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통장은 늘 텅장이다. 이놈의 무일푼 신세는 나아질 기미도 없고, 한숨만 낳는다. 친구는 이런 나의 신세한탄에 돈도 잘 벌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그 말을 취소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무일푼'이라는 말은 '돈이 한 푼도 없다'는 뜻이니까 지갑에 한 푼 정도라도 들어있다면 '무일푼 신세'는 사용할 수 없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낀 날이 있었다.
오랜만에 친구 A를 만난 날이었다.
만나자마자 한숨을 푹푹 쉬더니 자신은 이제 무일푼 신세라며 소주를 홀짝홀짝 마셔댔다. 이유인즉슨, 주식에 투자했던 10억이 마이너스를 찍었고, 부모님께 물려받을 땅도 있는 놈이란 말은 하지도 말라며 이 세상 우울까지 다 자기 것인 것처럼 들이켰다. 하지만 계산할 때는 "너 쪼들리는 거 다 아는데 내가 살게!"라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계산대에 내밀며 내 속을 긁듯 긁었다.
그날로부터 나는 무일푼이라며 속상해하던 친구가 대신 내준 술값 덕분에 진짜 애써 씩씩했던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쳇바퀴 돌듯 바지런히 살아봤자 나만 늘 제자리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월급날 잠시 머물렀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통장 속 숫자들처럼 작아지는 기분이 들어 터덜터덜 걷다가 무릎마저 고장 났는지 자꾸 아파서 버스를 탔다. 물론 앉을자리마저 없어서 마음이 휘청휘청거렸다.
버스 안쪽 자리가 나자 겨우 비집고 들어가 앉아서 한숨은 삼킨 후 "무일푼"을 검색해 봤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제목들이 줄줄이 보였다.
'무일푼으로 집사기'
'무일푼에서 인생역전한 비결'
'무일푼으로 시작하는 재테크 비법'
'무일푼'이라는 글자가 제목 맨 앞에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이 글의 타깃은 성공비법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 푼도 없는 사람'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관련 글이나 동영상 옆에 붙어있는 조회수 역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무일푼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일푼'의 반대말은 통장에 수백억이 있거나, 재테크에 성공하여 이자 수입으로 먹고사는 것이라거나, 집 외에 부동산이 몇 개 더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무일푼이 확실한데.......
그런데 '무일푼'을 글의 제목 뒤로 보내 버리니 말이 되는 듯 했다.
집 사서 무일푼,
인생역전하려다가 무일푼,
재테크하려다가 무일푼
갑자기 지금 우리가 무일푼인 이유는 원래 없어서라기 보다는 '무엇을 하려다가'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하기 위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집을 사기 위해, 사업을 준비기 위해 등 영끌하여 인생을 바꿔보고자 하는 나의 노력에서 온 지금인 것이다.
그러니 좌절하기에는 너무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보니 이렇고, 잠시 이러면 또 어떠한가? 잠시 소진될 수도 있는 것이지...
잠시 스쳐가는 텅장일 수도 있으니 조금만 더 무언가를 하며 걸어가 보리라. 답답하면 방법을 바꿔서 달려도 보면 언젠가는 통통해진 통장을 보며 웃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무일푼... 이랬는데...요래됐슴당' 인스타 릴스를 올리고 '무일푼'으로 시작하는 경제 서적을 집필하고 있을지도.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