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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센터 직원의 손길

by 현루


대한민국의 병원은 보통 1차, 2차, 3차 의료기관으로 나뉜다.


1차는 동네의원이나 개인병원으로, 감기나 당뇨, 고혈압 같은 가벼운 질환을 진료한다.


짧게 입원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 며칠 내로 퇴원한다.


2차는 종합병원급이다.


여러 진료과 전문의가 상주하고 정밀검사나 수술이 가능하다.


뇌졸중 이후의 재활치료도 주로 이곳에서 이뤄진다.

입원 기간은 대개 1주일에서 길게는 수개월이다.


3차는 상급종합병원으로, 중증 질환과 응급수술 등 고난도 치료가 중심이다.


여기서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2차 병원이나 재활병원으로 전원 되어 장기 치료를 이어간다.

나 역시 그 과정을 밟았다.


3차 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뒤, 2차 병원으로 옮겨 입원일수를 채웠다.


그리고 재활병원과 요양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요양병원에서는 간병과 유지치료 중심으로 지냈고, 재활병원에서는 남은 기능을 살려내는 훈련을 했다.


재활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의사는 7일분의 약을 처방해 주며 정기적으로 외래 진료를 받으라고 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혼자였다.

가족도, 지인도 멀리 있었다.

타지라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활동지원사 제도 신청을 했지만, 승인을 받기까지는 한 달 반이나 걸린다고 했다.


동행자 없이 휠체어를 밀며 병원까지 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며칠 고민 끝에, 휴대폰을 붙잡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주민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병원에 갈 수 있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총무과 직원과 통화를 하였다.


그는 처음엔 난처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규정상 그런 지원은 어렵다고.


나는 “괜찮습니다”라며 전화를 끊었지만,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 전화가 다시 울렸다.

“부서장님께 말씀드렸어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그 한마디가 그렇게 따뜻할 줄 몰랐다.


다음 날 오전, 두 명의 직원이 직접 찾아왔다.


약속했던 병원까지는 도보로 10분 남짓한 거리였다.

문제는 길이 내리막이었다.


그들은 휠체어를 번갈아 밀며 조심조심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접수와 진료, 처방전까지 챙겨준 뒤 약국으로 함께 갔다.


그런데 또 난관이었다.

필요한 약 중 하나가 품절이라 오늘은 구할 수 없다고 했다.

내 표정이 굳자 주민센터 직원 한 분이 말했다.

“걱정 마세요. 내일 약이 도착하면 제가 받아서 전달해 드릴게요.”

그 말대로 다음 날 오후, 직원이 약봉지를 들고 다시 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예전엔 ‘공무원은 무뚝뚝하고 형식적이다’는 인식이 많았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의 공무원들은 다르다.


규정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태도가 느껴진다.

그들의 친절은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사람을 향한 마음’이었다.

병원에서 배운 건 재활이었지만,

사회에서 배운 건 ‘함께 사는 법’이었다.


몸이 불편해진 후, 도움을 받는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자존심이 먼저 앞서고,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이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달라졌다.
누군가의 도움이 나를 살렸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세상이 다시 따뜻해졌다.

병원에서의 치료가 끝나면 삶의 재활이 시작된다.
나는 그 재활의 첫걸음을 주민센터 직원들의 손길에서 배웠다.


도움을 요청할 용기, 그리고 그 도움을 따뜻하게 내미는 마음.
그 두 가지가 어쩌면 이 사회가 지탱되는 힘이 아닐까 싶었다.

그날의 작은 민원은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친절은 규정보다 빠르고, 따뜻함은 행정보다 깊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내 곁으로 걸어와 준

두 사람의 발걸음이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날 받은 약보다 더 큰 약효는,

그들의 진심이었다.


그 덕분에 오늘도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다.
그리고 글을 쓰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되뇐다.

“고맙습니다.

그날의 손길이 제게는

삶의 연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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