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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그릇에 담긴 그리움, 카레

소소행(小笑幸), 직장인의 1인 밥상

by 규아

어릴 적, 우리 집 밥상에 카레는 낯선 음식이었다. 나는 소도시에 살았고, 카레는 TV광고나 만화책에서 보던 음식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 살던 숙모네가 이사를 오면서 우리 동네에 처음으로 ‘서울 물’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숙모네를 ‘서울깍쟁이’라 불렀고, 말투, 차림새, 살림살이에 관심을 가졌다.


한 번은 숙모 집에 놀러 갔을 때, 노란 국물에 밥을 말아주는 걸 처음 봤다. “이게 뭐예요?” 고 묻자, 숙모는 웃으며 말했다. “카레라이스.” 색깔부터 낯설던 그 음식을 한 숟갈 먹자마자 입안에 퍼지는 고소하고 달큰한 맛에 푹 빠졌다. 카레는 내 기억 속에서 ‘서울의 맛’이자 ‘새로운 것’의 상징이 되었다.


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물었다. “숙모가 점심으로 뭐 해줬어?” 나는 자랑하듯 말했다. “카레라이스! 맛있었어!” 며칠 뒤, 엄마도 카레를 해주셨다. 하지만 엄마의 카레는 탄 맛이 났다. 아무것도 없이 분말만 물에 개어 끓인 국물은 불조절이 안 돼 냄비 바닥까지 타버렸다. 묘하게 탄 내가 섞인 낯선 음식에 엄마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런 게 뭐가 맛있다고…”


그런데도 나는 그날의 카레가 인상 깊었다. 엄마가 나를 위해 처음 시도해 본 낯선 음식이었으니까. 서툴렀지만, 그 안엔 분명 엄마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뒤로 엄마는 카레에 점점 익숙해졌다. 어디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커다란 냄비에 카레를 잔뜩 끓여놓곤 했다. 마치 어른들이 사골국을 잔뜩 고아놓고 여행을 떠나듯이.


"김치랑 꺼내 먹어." 현관문을 닫기 직전, 엄마가 남긴 그 말은 부재의 시간이 시작된다는 신호이자, 그 시간 속에서도 괜찮을 거라는 다정한 약속 같았다. 나는 며칠 내내 질리지도 않고 카레를 먹었다. 김치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형제 없이, 엄마와 단둘이 살았던 시절. 그렇게 엄마마저 집을 비우면 혼자가 되었다. 나는 그 노란 국물과 함께 혼자를 견뎠다. 엄마가 된 나도, 아이들을 남겨두고 출근하던 날이면 카레를 끓였다. 냄비를 식탁 위에 두고, “김치랑 꺼내먹어.” 그 말을, 서른 해 전 엄마처럼 하고는 집을 나섰다.


몇십 년이 지나도 언제나 똑같은 카레. 익숙한 향, 오래된 냄비, 그리고 조금 타버린 기억까지 함께 끓어오른다. 엄마의 부재를 견디게 해 주었고, 내 부재를 감싸준 음식, 다시 떠오를 때면 이상하게도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그 이름, 카레.


카레는 그렇게, 허전함을 감싸는 음식이자 사랑을 되새기는 냄비였다.




노오란 한 스푼에 시간을 풀다


냄비에 노오란 시간을 풀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형형색색 재료에 스며든 온기는
오래된 인생처럼
뭉근한 맛과 색을 띠게 했다


아련히 녹아든 외로움도
그 안에서 천천히, 익어갔다



오늘의 1인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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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에 남은 카레를 다시 데웠다. 며칠 전 끓여둔 그것. 걸쭉해진 국물에 감자와 당근이 푹 익어 숟가락에 닿을 때마다 작게 뭉개진다. 열무, 알타리, 고구마순, 배추... 카레와 최상의 궁합인 김치들을 곁들인다. 노란 한 숟가락에 그리움 한 입. 혼자 먹는 밥상이지만 허전하지 않다. 그때 그 냄비와 골목 냄새가 식탁 위로 조용히 다가온다.


다음에는 박대 조림이다. 넓적하고 투박한 생선, 박대. 서해바다가 고향인 사람에겐 익숙하지만, 외지인에겐 낯선 이름이다. 간장 양념이 자작하게 배인 박대조림 한 토막. 젓가락을 대면 살이 야들야들, 밥 한 공기 뚝딱, 군산의 맛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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