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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과 미군, 군산에 스며들다

제2부 역사와 문화가 블렌딩된 도시

by 규아

전쟁은 모든 것을 부수었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 사람들은 살아야 했다. 살기 위해 떠밀려온 사람들, 그리고 전쟁을 업고 건너온 또 다른 사람들. 1950년대, 군산은 그렇게 두 종류의 이방인을 품었다. 피란민과 미군.


포화 속에서 밀려든 사람들

“서울이 무너졌대.” “한강 다리를 폭파했대.” 소문은 들불처럼 번졌고, 사람들은 보따리 하나 들고 남으로, 더 남으로 향했다. 누구는 부산으로, 누구는 목포로, 그리고 많은 이들이 군산으로 흘러들었다. 군산항은 도착지였다. 바다를 통해 피란선을 타고 도착한 사람들, 기차역에서 짐짝처럼 내려진 가족들.


판잣집과 비닐막, 담요 한 장으로 만든 집들이 장미동, 개복동, 신흥동, 중앙로 뒷골목에 들쑥날쑥 생겨났다. 양철을 엮어 집을 세우고, ‘집’이라 부르기 민망한 공간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눴다. 한 줌의 쌀이 전 재산이던 날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삶은 기적처럼 피어났다. 말랭이 마을에서는 호박 덩굴이 자라고, 헌 군복으로 아이들의 옷을 지었다. 서울말을 쓰는 사내, 함경도 억양의 아낙, 이름 모를 아이들. 그들에겐 고향이 없었고, 모인 곳이 곧 고향이 되었다. 이질적인 맛들이 함께 끓는 냄비처럼, 말투와 억양이 부딪치다가도, 밥상 위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군산은 또 하나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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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데려온 또 다른 이방인

피란민과 함께 이 도시에 상륙한 것은 미군이었다. 군산의 전략적 위치는 미 공군과 해군을 끌어들였고, 군산기지는 점차 확장되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미군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군산에 남아있다. 두 개의 이름을 지닌 땅, 군산이면서도 캘리포니아인 곳. 철책은 국경인 듯, 시간의 경계인 듯 도시를 가르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오늘도 그 안에서 이어진다.


이들의 주둔은 골목에 흔적을 남겼다. 군산 양키시장. 냉동 햄과 초콜릿, 수입 밀가루가 도떼기시장에 흘러들었고, 군용 담요와 생소한 포장지들이 동네 상인들의 손을 타고 이곳저곳으로 퍼졌다. 기지에서 흘러넘친 소비문화는 군산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속엔 빛과 그늘이 공존했다. 기지 주변의 여성들, 생계를 위한 선택, 불문율처럼 작동한 신분의 경계. ‘양색시’라는 이름보다 훨씬 복잡하고도 억울한 이야기가, 침묵 속에서 도시를 지탱했다.


기억을 품은 도시

피란민은 군산을 떠나지 않았다.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흔적은 지금도 도시 곳곳에 남아있다. 피란민이 만든 말랭이 마을과 골목은 당시의 삶을 드러낸다.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양장점, 북한에서 건너온 국숫집, 상가와 음식점들. 그 모든 것이 오늘의 군산을 이루는 풍경이 되었다.


기지 옆 골목에서 흘러나오던 블루스와 재즈, LP 바에서 아직도 들리는 그 시절의 음악. 그리고 여인들이 꾸렸던 삶의 애환은 이제는 박물관의 기록이 되었고, 어떤 이는 그 아픔을 소설로 남겼다. 도시는 기억으로 살아났다. 그 기억은 음식점의 간판에도, 골목의 색감에도, 바람 소리에도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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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렌딩의 도시, 그 뒤엉킨 이야기

군산은 그렇게, 역사의 흐름에 피란민과 미군이라는 두 개의 물줄기를 받아들이며 또 다른 문화를 품었다. 전쟁은 도시를 찢어놓았지만, 사람들은 서로를 꿰매듯 붙들며 다시 살아냈다. 피란민의 국은 지역의 맛이 되었고, 미군의 음악은 거리의 리듬이 되었으며, 화려한 불빛은 기억 속의 풍경이 되었다.


그 모든 낯섦과 억척스러움, 뒤엉킴과 살아남음의 기록이 오늘의 군산이라는 도시를 만들었다. 전쟁은 사람을 떠밀었고, 도시는 그들을 끌어안았다. 그것이 군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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