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7)
순서가 바뀐 것 같다.
앞서 말한 빈말의 무게는 이백오십만 원이라는 글에서 언질을 드린 일화이다.
그해 1998년
그 해는 내게 전쟁 같은 해였다.
시집을 출간하고 이제 작가의 꿈을 시작한 내게 가난이 무언지 가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해였다.
뱃속에 허락도 없이 커 가는 태아와 옥탑방에는 허락도 없이 기거하고 있는 한 남자.
그 둘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임산부인 나.
잠을 잘 시간도 없이 일을 했던 나에게 산달을 한 달 앞둔 11월이 왔다.
그날도 그 남자는 어김없이 내가 일하는 가게 앞으로 왔다.
가게 앞 편의점에서 그가 '레쓰비'를 샀다.
그런데 두 개를 샀다.
"나 커피 안 마시는데 왜 두 개야?"
"응. 아르바이트생 주려고~"
친절하지 않는 남자인데, 자주 가는 주유소 아르바이트생을 챙기다니. 내심 속으로 기특했다.
산달을 한 달 앞둔 마누라를 일 시키는 주제에 모르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웬 오지랖이냐 바가지 긁진 않았다.
그나마 이 남자의 사회성이 이 정도는 있다는 것. 그것이 내게는 감동 포인트였으니
이 감동이 얼마나 저렴한가.
그 당시 영동 대교 입구에는 주유소가 세 군대 있었으나. 우리는 그때 LG정유로 갔다.
새벽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은 순박하게 생겼고, 살짝 어리바리 한 면도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늘 만 원 치만 넣는 것이 미안했었기에 그럼에도 친절한 그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만 원 치요~"
그날은 이만 원 치를 넣었다.
그러자 그가 티슈를 사은품으로 건넸다.
남자는 그에게 레쓰비를 건넸다.
그러자 그는 영수증을 갖다 주면서 생수까지 챙겨 왔다.
그리고 그가 말한다.
"보너스 카드요~"
그 남자는 레쓰비를 주느라 보너스 카드를 챙기는 것을 깜박했다.
아르바이트생은 보너스 카드에 적립 포인트를 넣기 위해 들고 갔다.
그런데 그가 우리에게 올 때는 24 롤 휴지를 들고 오고 있었다.
순간 저게 뭐지 하면서 쳐다보는데. 아르바이트생은 점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결혼기념일 축하드려요!"
결혼기념일이라니!
결혼식도 하지 않았고, 아직 호적정리도 하지 않은 우리에게 결혼기념일이란 단어는 생소한 단어였다.
가만히 생각했다.
그래... 그 날짜!
보너스 카드 등록을 할 때 결혼 유무란이 있었고 거기 유란 글자에 체크를 하면
자연스럽게 써야 하는 날짜. 결혼기념일
그걸 본 내가 그에게 물었다.
"자기야. 결혼기념일은 결혼식을 한 날짜야? 아님 혼인신고를 한 날짜야? 아님 같이 산 날짜야?"
그도 가만히 생각해본다.
"에이... 그냥 우리 첨 만난 날을 쓰자"
그렇게 만들어진 결혼기념일.
그것이 바로 11월 2일이었다.
"오~ 기억하기도 좋겠다. 내 생일 한 달 전이네~"
해맑게 웃으며 적었던 기억이 그제야 떠 오른다.
기억은 개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게는 늘 지옥 같고 전쟁 같은 하루하루에
그 의미 없는 결혼기념일은 원망스러울 뿐이고
그날, 우리의 만남을 열두 번도 더 후회하고 있었을 그 타이밍에
LG정류가 우리의 그날을 기억해줬다.
차를 옆으로 세워두고 핸들에 머리를 박고 십 분을 넘게 울었다.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데
누군가가 축하한다고 24 롤 휴지를 준다.
나는 지금 이걸 받고 공짜라고 좋아해야 하나?
아님 그날을 증오하며 이 휴지를 어딘가에 버리고 가야 하나!
버리기에는 생활이 곤궁하다. 이 휴지가 절실하다.
이 모든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가장 쉬운 일이 이 핑계로 울 수 있는 일이다.
그날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 남자는 우는 나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 휴지를 들고 성수동 4가 544번지 옥탑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