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오늘 힘든 날이에요?”
“오늘은 조금 그런 날 인가 봐.”
“예. 소주 한 잔 마시고 담배 하나 피워요.”
추운 날. 시원한 소주 벌컥 들이켠 뒤 밖으로 나간다.
“별 수 없잖아요.”
“별 수 없지. 잘 알고 있어. 유예 기간이야.”
“쓰-읍, 후. 슬퍼요?”
“슬프지 않아. 속이 좀 쓰린 거지.”
“그게 그거 아니에요?”
“다르지. 다른 거야. 쓰-읍, 후.”
“혹시, 뭐가 다른 건지 설명을 좀…”
“뇌에서는 연인과 이별한 것을 그 대상이 죽었다고 인식한데. 그래서 슬프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거지. 나는 걔가 죽었다고 생각 안 해.”
“아, 또 왜 이렇게 진지하게.”
“들어가자. 춥다.”
다시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우린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소주잔을 채운 뒤 바로 목구멍에 부었고, 곧바로 굴 보쌈이 나왔다. 보쌈은 야들야들 촉촉하고 굴은 싱싱하다. 사장님께서 특제 막장을 듬뿍 넣어 쌈을 싸 먹을 것을 단단히 일러준다. 상추에 보쌈, 굴, 편 마늘, 청양고추, 수제 막장을 듬뿍 넣고 한 입 크게 넣는다. 또다시 소주 한 잔을 시원하게 털어 넣고 우리는 금세 여러 주제들로 대화를 시작한다. 어디로부터 건너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바람 같은 주제들. 만남 전의 공백에서 온 것인지 과거의 전생으로부터 온 것인지. 혹은 그냥 말이 많은 둘 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진한 얘기의 주제는 ‘사랑’이다. 내가 읽고 느낀 것들을 근호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한다. ‘사랑의 최소조건은 나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라고 하더라 하면서 그녀를 붙잡거나 알거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고도 얘기한다. 왜냐하면 그전엔 세 가지 모두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진정하고도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쉽다고 얘기한다. 근호는 내 얘기를 묵묵히 잘 들어주던 근호는 자신의 정적을 깬다.
“그럼 됐지.”
“맞아. 그럼 됐어.”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요?”
“아무것도.”
“노래방은요?”
“가야지.”
한참 동안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전에 나누었던 주제로 또 한 동안 떠들기도 하고, 장난도 주고받았다. 마치 그 시간과 공간은 누군가의 허락으로 인한 새로운 차원에 지어진 방 같았다. 단지 그곳에 넓은 식탁과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준비되어 있으며 술안주 삼을 음식과 몇 번을 주문해도 상관없을 녹색 술병. 그리고 기분 좋게 취하면 옆 자리로 이동한 뒤 마이크를 잡는 것이다. ‘함께 술자리를 못한 것이 우리의 한 이다.’의 주인공 광석이 형은 물론이고 근호의 유재하. 무한궤도의 신해철, 김현식, 이문세, 이정석, 변진섭, 들국화 등등 끝이 없다. 그리곤 우리 집으로 향하고 또 그들의 라이브 영상을 시청하면서 해가 뜨길 기다린다. 그쯤엔 사회구성원으로서 맨 정신으로는 표출하지 못하는 몇 가지의 결핍은, 마치 수증기가 되었다가 비가 되어 쏟아져 내린다. 주의보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참. 나는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에 잠에 들었다. 그리고 ‘어떠한’ 꿈을 꾸고 잠에서 깼다.
가장 큰 배낭에 옷 몇 벌과 속옷을 접어 차곡차곡 쌓는다. 겨울이라 좀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겉옷을 따로 챙기기도 어렵고, 안에 받쳐 입을 옷들은 또 두텁기에 몇 벌 챙기지도 못한다. 그래도 최대한 꾹꾹 눌러 담는다. 얼추 마무리가 되어 나가려는 순간. 휴대폰이 마음에 걸린다. 떠나는 길, 휴대폰은 동행자로서 어울리지 않는다.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낸 뒤 탁자에 올려놓고 나를 걱정할 몇 명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아주 잠시 여행 좀 다녀오려 해.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야. 단지, 어젯밤 꿈에서 본 장소 몇 군데를 다녀오고 싶어. 휴대폰은 집에 두고 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사실 꿈에서 본 장소가 어디인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 떠나야만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곧장 기차역으로 이동했다.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표를 잠시 들여다보곤 가장 빠른 출발이 가능한 논산역으로 정했다. 기차에 몸을 싣고 겨울의 따뜻함과 잘 어울리는 피아노곡 하나를 재생하려 했지만, 휴대폰을 집에 두고 온 것을 알아챘다. 그 곡은 슬픔과 희망, 삶과 죽음, 겨울과 따뜻함이 느껴지는 곡이다. 나는 머릿속 상상력을 동원하여 최대한 음악을 기억해 내려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나는 그저 지나가는 풍경을 대충 눈에 담았다. 왜 떠나온 것인지 모를 탓처럼 말이다. 책을 펼치고 싶지도 않은 무기력함을 느끼며 몸이 자꾸 흔들렸다. 겨울, 겨울이기에 혹은 봄, 봄이 오기 전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