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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굴, 보쌈.

by 김민석 Dec 10. 2024

 책을 그만 읽고 싶은 것인지 집에 가고 싶은 것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지만 우선 걷는다. 걷는 내 모습은 고개가 떨구어져 있는데, 오늘따라 몇 년을 함께한 검은색 구두의 주름이 잘 보인다. 나는 이내 또 시선을 옮겨 본다. 길바닥의 찬기는 어떤지, 맨 살에 닿는 바람은 또 어떻고 온기를 유지해 주는 겉옷은 또 또 얼마나 차가워졌을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껏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괜스레 몸을 중앙으로 모으기도 하며 조금 더 걷는다. (아무래도 그 편이 좀 더 따뜻하다) 작년에 구매한 다홍색 바탕의 체크 패턴 목도리가 가진 색이 아주 마음에 드는데, 조금 헐렁한 것 같아 매무시를 다시 한다. 반으로 반듯하게 접고 매듭 부분을 신경 써서 찰랑 지게 고친 것은 불이 꺼진 미용실 통창을 거울삼아 완성했다. 나는 금세 지하철역 출구 앞에 도착한 뒤 자연스럽게 계단을 한 칸씩 밟고 내려간다. 개찰구를 지나기 전 36분짜리 협주곡의 재생버튼을 누른다. 이어폰을 귀에 깊숙이 밀어 넣고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서는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기에 꼭 거쳐야만 한다.


 빈자리가 곳곳에 있다. 하지만 출입문 왼편에 몸을 바싹 붙이고 몸의 중심도 같은 방향으로 둔다. 이 자세는 생각보다 안정적이고 안락한 느낌이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 이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협주곡에 집중하다 보면 악장의 변화에 따라 감정도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초반부의 정적을 깨는 피아노 소리와 곧이어 대열에 합류하는 현악기. 그리고… 여러 악기도. 미세하게 고조되는 중반부 분위기를 지난 뒤 후반부에 터져버리는 그 순간은 참았던 것인지, 숨겼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펑! 펑! 터져버리고 아름답게 소멸한다. 이 템포에 맞춰 나도 터져 버리는데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작은 전류가 타고 올라온 뒤 눈물샘 근처로 떨어진다. 거의 매 번 비슷한 것을 느끼는데 눈물이 흐를까 조마조마하며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은 아주 웃길 것이다. 필사적으로 흐르는 눈물을 참아내고 있는 그 순간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어.”

“동수 형, 어디예요?”

“나 집 가는 길이지.”

“굴 보쌈 잘하는 곳 있는데.”

“주소랑 만날 시간.”

“예. 보내 놓을 게요.”


 나의 몇 안 되는 친구 겸 술친구인 조근호. 서른 넘어 만난 친구이다. 가끔 혼자 들리는 포장마차가 있는데, 그날 따라 손님이 많았다. 운 좋게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그 왼편에 조근호가 있었다. 홀로 잔치국수와 제육볶음을 시켜 놓고 소주를 마시며 핸드폰으로 김광석 라이브를 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술이 얼큰하게 올라왔을 때“김광석 좋아하세요?”하며 말을 건넸고,“유재하를 더 좋아합니다.”하고 대답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서 말없이 술잔을 건네니 잔을 받아주었는데, 둘이 약속한 것 마냥 웃어 대던 것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친구는 말 장난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마도(확실한) 아버지의 영향일 것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술 마시는 시간은‘재밌게 노는 시간.’이다. 언젠가 한 번 조근호가 그랬다.  


“재미있게 놀고 싶다.”

“재밌는 게 뭔데?”

“진한 얘기들, 노래, 앞 날, 지나 온 날.”


 정확히 저렇게 이야기했다. 항상 그래왔고 오늘 만남에서도 그럴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주제를 정확하게 정의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든다. 그리고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차고 넘치는지 자주 재미있게 놀고 있다. 그렇게 나는 약속 장소로 목적지를 변경하고 문득 헤어진 그녀를 생각한다. 겨울에 만난 그녀와 굴 보쌈을 먹었던가? 결론은 함께 먹은 적이 없다. 겨울에 만난 그녀와 굴 보쌈조차도 같이 먹지 않았다니. 그럴 만한 인연의 끈이었던 것인지 남은 인연의 끈으로 먹게 될 것인지. 생각도 잠시, 약속 장소가 탑승해 있던 5호선 열차를 타고 공덕역에서 하차를 한 뒤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약속 장소에 도착하였고 조근호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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