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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Jul 10. 2023

[직관과 단상] 3. 여름나기

- 여름, 길어지다

6월 21일 하지가 지났다. 여름은 길어졌다. 

1년 사계절 중 두 번째인 계절인 여름은 기상학적으로는 보통 6월에서 8월까지를 말하고, 천문학적으로는 하지(보통 6월22일경)부터 추분(보통 9월23일까지)를 말한다. 


그런데 심적으로 느끼는 여름은 5월부터 10월까지인 것 같다. 5월부터 낮이 뜨겁고 10월이 되도 밤이 무덥다. 

지난 주말, 에어컨 없이도 견딜만 하던 날을 보내며 매일 나날이 이런 날씨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 온 뒤 불어오는 바람이 주는 청량함. 주말 루틴도 덕분에 상쾌했다. 아이와 1시간 가량 산책하는 일은 거르지 않으려 노력 하는 편인데 걷기도 걷기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다. 

좋아하는 음악이며, 신기한 뉴스며, 학교 수업이나 학원 수업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고

친구들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눈다. 그렇게 걷다 보면 힘든지도 모르게 시간은 간다. 


이 루틴을 시작한지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가 먼저 나서서 산책가자고 할 정도로 아이에게는 하지 않으면 안되는 습관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나 역시도 처음에는 귀찮고 때로는 건너뛰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그 시간이 되면 옷을 챙겨입고 나갈 채비를 한다. 


밤 산책을 나서면 동네 공원에 의외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날이 무더워지자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늘어서일까. 삼삼오오 모여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무리의 사람을 보는 것도 꽤 상쾌한 일 중에 하나다. 




한때 내게 여름은 에어컨과 시작해 선풍기로 야밤을 보내는 계절이었다. 

6시 이후에는 냉난방기 운행이 중단되는 사무실에서 9월 정기국회를 준비하느라,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서류더미와 씨름했다. 여름휴가는 가기도 하고 못가기도 했다. 가도 이삼일이었던 것 같다. 

체력이 그나마 좋았던 시절이라, 일주일에 사나흘을 서너시간 자고, 주말도 출근해 일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 

더웠지만 일에 대한 중압감으로 더위를 못느꼈던 것 같다. 


벚꽃이 만개하던 4월에는 각종 선거철이 되었으므로, 가을 단풍이 물든던 9,10월에는 정기국회와 국정감사로

계절이 흐르는지 모른채 지내다가 첫눈이 내릴 때쯤 지쳐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에 

슬럼프를 거듭하던 삶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더디던지, 동료들과 늦은 밤 국회운동장 어딘가에 털썩 주저앉아 시간이 빨리 가면 좋겠다고 했다가, 막상 이삼일 뒤로 다가온 국정감사 일정에 헉헉대며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에게 여름은 어떤 시간일까. 

방학을 기다리노라며 방학을 하면 매일매일 걷고, 도서관도 가겠노라며 야심찬 계획을 말하는 아이에게 

너도 심적인 중압감 같은 것을 느끼냐고 물었다. 우문이었다. 

그따위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변을 해오는데, 중간고사 시즌이 끝나고 곧 기말고사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느낄때면, 학원에서 시험을 봐야한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마다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안된 생각에 잠시 쉬어도 된다고 말하자, 그러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이또한 지나갈거고, 다 겪는 일일테고 아직은 못견딜 정도는 아니라며. 그리고 모든 것을 끝내고 난뒤 오는 개운함은 뭣하고도 바꿀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노라고. 


아주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집에서 이불놀이를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놀이지만 두꺼운 겨울 이불을 가위바위보에서 진 아이에게 하나씩 머리와 다리를 빼고는 덮어서 위로 쌓는다. 

그리고는 숫자를 센다. 누가 오래 견디나 게임과 같은 것이었는데, 한가지 룰이 있었다. 

이불을 빠져나올 때는 슬그머니 나오면 안되고 세게 이불을 박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엄청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리고 한번에 이불을 박차는 아이에겐 다음에 이불을 쌓을 기회가 주어지는 일석이조의 룰이었기에 우리는 누구도 군말없이 룰을 따랐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에서 갑자기 찬바람이 스치면 이불속 아이나 그걸 지켜보는 아이나 숨넘어가게 웃었다. 




덥다덥다 하면 더 덥다.

그렇다고 더운데 시원하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더위와 맞서는 방법을 나름대로 찾는다면

먼 훗날 그해 여름은 더웠다로만 기억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 당시에는 더웠어도 다른 뭔가로 그 기억은 덮인다. 신기하게도.


올 여름은 저녁 늦게 아이와 걷고 대화했던, 무더웠지만 즐거웠노라고 기억될 것 같다. 

그나저나 이번주 내내 비가 온다는데, 그렇다면 산책을 하지 못하는데

뭘하면서 아이랑 대화를 하나....

산책은 뭘로 대신하지. 

작지만 즐거운 고민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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