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시어머니를 탓하는 글을 쓰고 싶진 않습니다. 팔십 평생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 오셨을 거고 그때 그 시절과 다른 시대를 살면서 얼마나 외로우실지 아니깐요. 또 자꾸 싫다 싫다 하면 정말 싫어지는, 마음이 관계를 지배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땅의 모든 며느리들이 그러하듯 어머님께 한없이 부족한 며느리지만 그래도 지낸 세월이 있으니 조금이나마 저를 인정해 주실 거라고 믿었을 뿐입니다.
7,8년 전쯤 실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전에도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아예 실직을 한건 처음입니다. 자발적이면서도 비자발적 실업이었고 준비 없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십 년을 일했으니 좀 쉬자는 생각도 있었지만 실직자가 된 뒤 얼마 못 가 이러다가 아예 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겨났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잠깐 쉬다가 다시 일을 할 거라고 했습니다. 이십 년 직장생활에서 방전된 나를 돌볼 기회를 갖겠다고 했습니다. 친정엄마는 좀 쉬어라, 푹 쉬어라, 여행도 갔다 오면 좋겠고라면서도 그 나이에 일자리 구하기 힘들 텐데라며 떨떠름하게 응원해 주셨죠.
생각해 보면 예측이 됐던 실직이었습니다. 제가 미처 서둘러 준비를 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준비를 못한 이유는 반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반은 계속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반은 이제는 좀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 그 생각 속에서 해답을 찾기 전에 실직이 찾아온 거죠.
그럴 때 격려하고 응원하고 고민을 나누고 길을 함께 생각해 보고, 안되면 그냥 지켜봐 주는 게 가장 가까운 가족이겠죠.
하지만 현실 속 가족은 더 먼저 불안해합니다. 아주 많이 불안해합니다. 볼 때마다 아이고 어쩌니 하면서 감정적으로 증폭시키기도 합니다. 누군가 '그 집 딸 아직 그 회사 다녀?'라고 물을 때 '관뒀어'라고 말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죠. 설령 놀고 있어도 일하고 있다고 말하고, 놀고 있는 자식에게는 차갑고 일하는 자식에게는 관대하죠. 실직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에는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직장생활 다 그렇지, 미리 준비 좀 하지. 남들은 다 자기 살길 찾아갔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라고 잔소리를 더합니다.
친정엄마도, 동생도 다들 걱정을 빙자한 불안을 표출합니다. 나 홀로 인생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입니다.
저희 어머님도 그런 분이십니다. 거기에 아들 지상주의까지 결합되어 있죠. 일하는 며느리에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아들이 집안일하는 꼴은 못 본다'는 말씀을 결혼 초부터 수시로 하셨던 분인지라, 솔직히 힘들고 불편했습니다. 그래도 그런 건 적절히 지혜롭게 하면 되는 일이어서 시간이 지나니 그런가 보다 하게 됐고, 겉으로는 그래도 마음만은 저를 생각한다는 여겼기에 '철 지난 말씀 그만하시라'라고 이제는 편하게 할 말 다하는 사이가 됐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만든 강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건너려고 해도 건널 수 없는, 깊이나 넓이가 가늠이 안 되는 그런 강.
어떨 때는 상당히 얕은 냇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바다처럼 깊고 넓은, 그런 강.
실직했을 때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습니다. 상황 때문에 더 예민하게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어머니는 저를 자식 대하듯 하지 않으셨고, 뭐랄까 좀 거리를 뒀다고 해야 할까요. 차가웠다고 해야 할까요.
이십 년을 일하고 퇴직을 했는데,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며 헛헛한 며느리를 향해 고생 많았다, 수고 많았다는 말은 커녕 무언의 압박을 보내셨습니다. '너까지 놀면 가정경제는 어떻게 되는 거니.'라는.
결혼초부터 들쑥날쑥 경제활동을 한 남편 덕분에 제가 거의 가정경제를 책임졌습니다. 저는 돈 버는 능력 있는 사람이 돈 벌면 된다는 주의여서 그런 건 크게 괘념치 않는 편입니다. 물론 성인이 경제활동을 해서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건 기본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 경제활동을 통해 기여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을 제가 만난 거라 여겼습니다. (남편은 봉사나 다른 사회참여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해서 불만이 없으니 어머님께도 그런 부분에 대해 일절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저는 그저 다른 말 필요 없고 "고생 많았다. 고맙다." 어머님이 제게 이 말 한마디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도 제게 고생 많았다고 말하지 않는데 어머님이라도 말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남편이 고맙다 말하는 건 너무 식상하고 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정말 지난 이십 년이 헛되지 않게 느껴질 것 같은데... 어머니는 끝까지 고맙다는 말씀 안 하시더라고요. 슬쩍 여쭤봤습니다. "어머니, 저한테 안 고마우세요?"
고맙다는 말은 미안한 마음을 밑바탕으로 하는 거고, 결국 자신 아들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서 끝까지 그 말씀은 하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제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아들이 주눅 들까 걱정도 되신다고 하셨지요. 느끼면 되지 말이 뭐 필요하냐는 말씀이겠지요. 제가 며느리가 아니고 딸이었다면, 그때도 그 말을 입밖에 꺼내기 힘들었을까요.
저도 아들을 키우고 있으니 언젠가는 제게도 며느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부디 저는 고마우면 고맙다 말할 수 있는 시어머니가 되길, 괜찮은 노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많은 수련의 과정을 거치길... 바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