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덕분에 갖게 된 많은 것들

나는 40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자기 돌봄'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까진 그저 살아가기에 바빴다. 회사에서, 가족 안에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들을 해내느라 정신없이 달려왔다. 특히 매니저라는 직업은 타인의 인생에 많은 부분 관여하고 그의 인생의 큰길을 잡아주는 직업이라 더욱 그러했던 거 같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지쳐 보이는 모습이 되었을까.

첫 번째 시도는 우스웠다. 퇴근 후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걸음을 옮기는 내내 머릿속엔 밀린 업무 생각뿐이었다. 나무를 보면서도 엑셀 표를, 꽃을 보면서도 회의록을 떠올렸다. 집에 돌아와 웃음이 났다. 이게 내 현주소구나.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엔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갔다. 처음엔 불안했다. 혹시 중요한 연락이 올까 봐,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이 시간, 오로지 나만을 위한 이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깨달았다.

주말엔 러닝을 시작했다. 처음엔 뛰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쉽지 않았다. 운동을 좋아하고 꾸준해왔던 나에게도 쉬지 않고 달린다는 것이 괴로웠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길 위에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쉽게 뛰는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그 모습에 나도 다시금 마음을 먹고 달렸다.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몇 미터도 못 가서 숨이 차고 땀만 뻘뻘 흘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나의 모습이 좋았다. 내 몸에 집중하는 그 시간만큼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길 위에서 나는 오롯이 '나'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변화는 미묘했지만 확실했다. 조금씩 뛰는 걸이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5km를 쉬지 않고 뛰는 것에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건강해지는 것 같은 나의 컨디션이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조금 더 수월해졌고, 거울 속 내 표정이 조금 더 밝아 보였다. 회사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예전처럼 모든 일에 쫓기듯 달려들지 않게 되었다. 잠깐의 여유, 작은 숨 고르기가 생겼다. 오히려 달리기를 하며 숨이 차오르는 경험이 나의 여유를 찾아준 것이다.

어느 날은 퇴근길에 문득 서점에 들렀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시집 코너로 발길이 향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시구들이 나를 반겼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시를 읽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나는 다시 스무 살이 되었다.

때론 작은 사치를 부렸다. 평소 즐겨 마시던 커피 대신 조금 비싼 차를 주문했다. 향긋한 얼그레이 티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진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물론 여전히 불안하다. 이렇게 나 자신에게 시간을 쓰는 게 과연 옳은 걸까?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되뇐다. 나를 돌보는 일도 중요한 삶의 과정이라고.

6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완벽하진 않다. 여전히 실수하고, 후회하고, 걱정한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내가 나를 좀 더 따뜻하게 대하게 된 것 같다.

오늘도 나는 퇴근 후 공원을 산책한다. 이제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노을을 보며 업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대신 내일 아침 먹을 샌드위치를 무엇으로 만들까 고민한다. 작은 변화지만, 내겐 큰 의미다.

40대의 중반을 향해 가는 지금, 나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자기 돌봄이란 거창한 게 아니라는 걸. 그저 매일 조금씩, 내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게 결국 나를 지키고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걸.

인생이란 긴 마라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은 어쩌면 필수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힘들 때가 있겠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내 곁에 늘 나 자신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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