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죽음으로 돌아와 보자. 나에게 죽음은 이제 현실이다. 죽음이 현실이라니. 모순적이지만 사실이다. 죽음으로 인해 나에게 주어진 실제적 이득은 분명했다. 나는 더 이상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괜찮지 않음을 그대로, 혹은 더욱 과장해 드러내며 나에게 시행했던 수동적 강압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라도 괜찮은 척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그 불편한 긴장감을 나는 견뎌내지 못했다. 나도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누군가를 위해 멀쩡한 척하며 도움을, 조언을, 웃음을 줬다. 나만 그랬다. 누구도 나에게 그래주지 않았다.
나를 보살펴주는 사람은 어차피 없었으니 이제 와서 관계에 대한 목마름도 있을 리 없다. 나는 힘들어도 보살폈지만 그 역이 성립한 경우는 없었기에 오히려 평온하기 그지없다. 나는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거나 죽어있다. 원했던 바다. 오래전 위빠사나 명상을 하던 중 그 상태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느꼈던 적이 있다. 이제야 그 상태에 다시 놓인 기분이다. 어떤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행위. 모든 것이 의미를 갖는 상징적 세계로부터 벗어나 무의미의 바닷속으로 침잠하는 일은 치유적 죽음이다. 지금의 내 상태처럼.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직 이곳은 일종의 결계와도 같다. 내 안에는 분노라는 이름의 상징적 의미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원망이라는 이름의 음울한 정서 또한 또렷이 살아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쓰고 있다. 나의 수액을 빨아먹고도 눈 감고 입 닫았던 그 모든 이들이 같은 고통을 받아보기 원한다. 나의 노동력을 착취하고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세상의 어떤 곳들은 몰락하기를 바란다. 억울하기 때문이다. 고용 플랫폼의 부당한 대우가 바다 밑 심연의 시발점이 되어 한꺼번에 수면 위로 튀어 오르게 된 나의 그 모든 억울함은 타인에 의해 내가 부정될 때 겪는 절망감이다. 절망은 무릎으로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나를 짓눌렀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평화롭다면서 왜 이렇게 부정적인 정서를 뿜어내고 있을까. 분노는 고요함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나의 분노를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 또한 고요함의 일부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다. 분노와 억울함을 억제하고 통제했던 결과물이 분노와 억울함이었으니까. 그러니 나는 나의 그것들을 이렇게 분출하고 인정하고 바라보고 흘려보내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비로소 해방되기 위해서. 그게 내 죽음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