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 ! 오답입니다. 임신에 정답은 없으니까요.
뼛속까지 J인 나는
일상의 사소한 일조차 계획을 세워야만 마음이 놓였다.
여행을 준비할 때는 더욱 철저했다.
출발 시간과 도착 시간은 기본,
식사 장소와 시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화장실에 들르는 타이밍까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혹시라도 계획에서 단 하나라도 어긋나면
온종일 불편함이 가득 차올랐다.
1분 단위까지 빼곡하게 세워둔 계획표는
내게는 일종의 방패이자,
마음을 안정시키는 작은 약과도 같았다.
그런데, 임신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J인생에 가장 P 같은 일이었다.
엄마가 되었음을 인정했으니,
이제는 다시 J답게 정리하고,
계획을 세울 차례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이미 벌어진 일.
그러니 공부하자. 임신도 공부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결심하던 순간—
웩.
입덧이었다.
무시무시한 입덧의 신호탄이 터진 거였다.
입덧에도 종류가 다양하다더니,
나는 하필이면 먹덧과 토덧의 콜라보였다.
텅 빈 속일 때는 울렁거림이 최고조에 달해
뭐라도 입에 넣어야만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간신히 한입을 삼키고 나면,
곧장 거센 파도처럼 구토가 몰려왔다.
아이러니했다.
어릴 때부터 단 한 번도 정상 체중이었던 적이 없는,
자타공인 모태 통통이었던 내가
오히려 임신으로, 그것도 입덧 때문에
살이 빠져가는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다니.
세상에, 임신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예측 불가능한 일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J의 철저한 계획과 통제조차
속수무책으로 무너뜨리는,
그야말로 인생 최대의 변수였다.
정보가 부족해서였을까.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던 것들도
막상 내게 닥치니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가장 먼저 힘들었던 건,
‘참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아침마다 눈 뜨자마자 챙겨 마시던 진한 아메리카노.
피곤한 하루를 버티게 해주던 그 한 잔이
임산부 1일 카페인 권장량이라는 딱딱한 규칙 앞에서
하루 한 잔으로 줄어들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도
진통제를 아무렇지 않게 삼키던 예전과 달랐다.
임신부가 되자, 약 한 알조차 신중해야 했다.
그 작은 알약 하나가
아기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픔을 참는게 익숙해졌다.
퇴근한 남편과 오붓하게 나누던
시원한 맥주 한 캔도 더 이상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예전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던 무알콜 맥주를
이제는 냉장고에 쟁여두고 살아야 했다.
그렇게 내 일상에서 하나둘 사라지는 것들이 늘어가자,
평범했던 순간들이 새삼 소중하게 다가왔다.
전에는 지루하다고만 여겼던 일상조차
더 이상 그대로 누릴 수 없게 되자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아쉽고,
심지어 안타깝기까지 했다.
성격도 급하고 인내심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나는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 참아야 하는 거지?’
호르몬이란 녀석이 이미 내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예민해졌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화가 났다가도, 이유 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곤 했다.
어떤 날은 텅 빈 방 안에서
혼자 훌쩍거리며 울음을 삼키기도 했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은 결국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남편에게 향했다.
“너 때문이야.”
못난 말로 시작된 원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에게 쏟아지곤 했다.
나는 작은 파도에도 휘청이며 흔들리는,
낯선 바다 위의 항해자 같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밀려드는 감정의 파도는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고,
나는 그저 부표처럼 떠다니며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나는 자꾸만 이 변화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주차에 따라 아기는 어떻게 자라는지,
어떤 검사를 언제 받아야 하는지.
책을 펼치고, 검색창에 단어를 하나둘 입력할 때마다
내 삶은 새로운 질문과 답으로 채워졌다.
두려움보다 궁금함이 더 커졌고,
걱정보다는 호기심이 나를 이끌어갔다.
낯설고 막막한 시간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엄마’라는 이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어느새
온통 ‘임산부 브이로그’로 도배되었다.
임신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 다들 한 번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누군가의 임밍아웃 영상을 보며
내 일처럼 눈물 콧물을 훔치고,
누군가의 출산 장면을 보며
마치 내가 내일이라도 아이를 낳을 것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아직은 불러오지도 않은,
겨우 1~2센티 작은 존재일 뿐인데도
괜히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걸게 된다.
“정말 네가 거기 있니?”
“내가 임신한 게 맞을까…?”
끝없이 의문이 차올랐다.
내 뱃속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어느새 가장 분명한 진실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아이에게 좋다는 건 무조건 하게 되고,
조금이라도 해롭다는 건
기를 쓰고 멀리하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나와는 다른 생명을 품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몸을 바라보며,
조금은 두렵지만, 그보다 훨씬 더 설레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