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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로망은 개뿔.

그럼에도 나는 신부였다.

by 온오프


임신 기간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안정기에 접어들면 대부분 멈춘다고 했던 입덧은

내게는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에 눕는 순간까지

언제 어디서든 몰려오는 구역감과의 싸움이었다.
차 안에서는 물론, 앉으나 서나,

심지어 잠깐 산책하는 도중에도

갑작스레 몰려오는 파도 같은 울렁임은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꾹 참고 넘겨보려 했지만

속을 뒤집어엎듯 몰아치는 구토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와중에 결혼 준비까지 겹쳤다.

비혼주의였던 나는 사실 결혼이라는 단어에

특별한 설렘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드레스, 예식장, 신혼여행 같은 것들은

내 삶의 어휘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고

그저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들이 누리는 이벤트일 뿐이었다.


그러니 나에게 결혼이란,

눈부신 로망이 아니라 그냥 “해야 하니까 하는 것”에 가까웠다.


필수 과정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막상 준비를 시작하니 그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상견례 날짜를 조율하는 일부터가 이미 한바탕 전쟁이었다.
양가 부모님의 일정과 의견을 맞추는 일은 바둑판 위의 수싸움 같았다.


겨우 날짜를 정하고 나면

이번에는 결혼식 날짜를 잡고 예식장을 예약하는 절차가 이어졌다.
내가 막연히 ‘간단한 절차 몇 가지면 끝나겠지’ 하고

생각했던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과정이었다.
수많은 전화와 미팅, 끝이 보이지 않는 선택의 연속.
예식장 상담을 다녀오면 다시 견적서를 비교해야 했고

하객 수와 예산 문제를 놓고는 밤마다 남편과 설전이 이어졌다.


그 과정을 단순히 문장 몇 개로 정리해버리면

겉보기에는 가벼워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체력은 체력대로 소진되고 마음은 마음대로 너덜너덜해졌다.
한마디로 준비 과정은 기쁨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희노애락이 다 들어 있었다.


때론 사소한 문제를 두고도 목소리가 커졌다가

금세 화해하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도 했고

그러다 서로를 꼭 끌어안으며 다시 다짐하기도 했다.
울고 웃는 하루하루를 이어 붙이며

겨우겨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결혼식장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은

그 자체로 파도처럼 몰아치는 드라마였다.


누군가는 말했다. “결혼은 지옥이다.”
또 누군가는 말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그 말들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싶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이지,

두 말 중 어느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느꼈다.




온통 핑크빛일 줄 알았던 사랑은

때로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설레는 순간마다 반짝일 것 같던 관계는

어느 날은 이유 모를 싸움으로 얼룩졌고,
또 어떤 날은 다시 서로의 손을 꼭 잡으며

초록처럼 싱그럽게 반짝였다.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라 타버리기도 했고

아무 일도 없던 듯 무채색으로 가라앉기도 했다.


흠뻑 젖어 무겁게 가라앉는 날도 있었으며,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도 있었다.
사랑의 빛깔은 결코 한 가지 색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계속해서 변주하며 나를 흔들었고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기도, 더 여려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뱃속의 아이는 묵묵히 자라났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는 낯설음에 당황하면서도,
나는 신부라는 이름을 준비해야 했다.
불어난 몸을 감싸는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웨딩촬영까지 무사히 마쳤다.


사진 속 내 웃음은 어쩌면 억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래도 나는 신부다”라는 마음을 믿고 싶었다.
렌즈에 담긴 웃음이 진심이든 아니든

그날의 나는 분명 인생의 한 장면을 살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예단이나 예물 같은 형식적인 절차를 다 생략하기로 했었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고 가벼운 방식이 오히려 좋았다.
화려한 장식품보다 중요한 건 함께 살아갈 마음이니까.


하지만 아빠는 달랐다.
“딸 가진 죄인”이라는 말과 함께

혹여 내가 시집살이를 하게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셨다.
훗날 혹시라도 ‘예단을 생략했다’는 사실이 내 약점이 될까,
딸이 억울한 일을 겪지는 않을까.
그 불안한 마음 하나로, 아빠는 정성껏 예단을 준비해 보내셨다.


정작 본인은 그 무엇도 받지 못했는데도,
아빠는 늘 그렇듯 나를 위해 모든 걸 내어주셨다.
그저 또 한 번,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주셨을 뿐이다.
그 마음이 나를 끝내 울컥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릿해진다.
살아온 날들 속에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 속에서도
아빠는 언제나 그렇게 나를 위해 자신을 깎아내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몸으로 드러났다.
조금만 긴장하거나 과로해도

종종 배가 단단히 뭉치며 경고를 보내왔고,
그럴 때마다 나는 몸속에서

“그만해, 쉬어야 해” 하고 신호를 보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그 낯선 감각은

나를 불안의 구렁텅이로 끌어내렸다.

임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였던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검색창을 두드렸다.


“배뭉침 원인”, “임산부 위험 신호” 등등..
끝없이 키워드를 입력하며 답을 찾으려 했지만,
각기 다른 경험담과 의학적 설명은 오히려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유튜브 영상에 휘둘리고, 네이버 글에 휘둘리며,
나는 어느새 산부인과의 단골손님이 되어 있었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초음파 검사 횟수는 이미 진작에 넘어섰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런 나를 보고 “괜히 유난 떤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안 앞에서 나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이의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는지,

혹시라도 작은 이상 징후라도 있는 건 아닌지—
그것을 직접 확인해야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화면 속 작디작은 심장박동을 볼 때마다

비로소 안도하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담석증이라는 짐을 이미 짊어지고 있었다.
임신 전부터 추적관찰을 받아왔는데,

임신과 동시에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쥐어짜듯 몰려오는 통증은 차라리 날카로운 칼날이 뱃속을 긋는 것 같았다.


호흡이 막히고, 진땀이 흐르며,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의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뱃속의 아이를 지켜야 하기에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처지는 그 고통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를 낳던 순간보다

담석증의 통증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출산은 분명 극심한 고통이지만

그래도 낳고 나면 그 순간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담석증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다시 몰려올지 모르는 끝없는 파도였다.

그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함이 나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지독히 아팠다.
몸이 찢어질 듯 아픈 순간에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차라리 지금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
철없고 무서운 생각까지도 내 마음 한구석에 몰래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생각 뒤에는 늘 뱃속의 작은 생명이 있었다.
내가 쓰러지면, 함께 사라질지도 모르는 아이.
그 존재 하나가 나를 붙들어주었다.
아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그 시간들을 끝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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