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식구들은 아침 식전에 인근 공원을 산책하곤 했는데 그날 아침에는 큰 아들(고2)이 뒤쳐졌다. 개학 직후라 일어나는 것이며 산책 같은 것이 마뜩지 않았던 모양이다. 공원을 한 바퀴쯤 돌았을 때 큰 녀석이 까만 개 한 마리를 달고 여유 있게 등장했다. 공원에 들어오려면 출입문과 함께 `ㄹ`자 형태로 된 미로를 통과해야 하는데 큰 녀석이 공원에 들어올 때 이 개도 뒤따라 들어왔다.
우리가 공원을 걷는 동안 이 까만 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가끔 한 다리를 들고 풀숲에 쉬야를 해가면서, 입을 쩍~ 벌린 채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적당히 큰 키에 잘록한 허리, 땟국물이 흐르는 꼬질꼬질한 행색이 분명 거리의 수캐였다.
공원 한구석에 작달막한, 아이들에 의하면 만화 ‘돌아온 백구’에서의 백구 같이 생긴 녀석도 한 마리 어슬렁거렸다. 까만 개가 백구의 엉덩이에 코를 들이대며 친한 척을 한번 해보았는데 백구는 ‘크르릉’하며 단번에 퇴짜를 놓고 말았다. 까만 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사전에는 자존심이라곤 없는 듯 깨끗이 물러섰다.
순박한 눈빛으로 관심이 있는 듯 없는 듯 우리를 따르는, 공격성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녀석에게 “쭈쭈쭈”하고 혓소리를 내보았더니 금방 꼬리를 흔들며 아는 체를 해왔다. 너무 쉽게 다가온 그의 반응이 평소 개를 키우고 싶어 하는 둘째 아들(초5)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공원을 나서는데 예상했던 대로 까만 개는 우리 가족의 뒤를 따라 나왔다. 집에서 기르지는 못하겠지만 골목에 ‘안면 있는 개’를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논의가 시작되었다. “검둥이 어때?” 했더니 큰 녀석이 대뜸 “흑인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종차별을 더 한다니까” 하며 반대한다. 상당히 비약이 심하다.
저만치에서 주인의 목줄에 엮인 누렁이 세 마리가 등장하면서 우리 식구와 까만 개의 관계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성질이 상당히 사나워 보이는 개들이었다. 우리와 길 가운데를 함께 걷던 까만 개는 주저도 없이 민망할 정도로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걷기 시작했다. 사나운 녀석들의 눈길은 성의를 다해 길을 내준 까만 개를 놓치지 않았다. 너나없이 목줄을 팽팽히 당기며 달려들 듯 까만 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집에서 기르는 개들은 주인을 똑 닮는다니까.” 이번에도 큰 녀석이 불만이다.
사나운 개들의 성화를 애써 외면하며 ‘으르렁’ 소리 시늉도 한번 내보지 못한 까만 개는 우리 가족의 말 없는 성원 정도로는 허세를 부릴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는 듯했다. 사나운 개들이 지나가고 난 후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미천한 까만 개에게 반은 화가 나고 반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하고 물었던 옛 수행자(*)를 떠올리며 문득 “개에게도 신분이 있는가?” 자문해 보았다. 앞장서 걷던 까만 개가 우리 집을 지나쳐 가기에 퉁명스럽게 “야 이놈아 여기가 우리 집이란다” 했더니 금방 돌아왔다. 둘째가 한번 만져보고 싶다며 조심스럽게 그 녀석의 머리와 목을 쓰다듬었더니 그는 가만히 아들을 맞이했다.
“내일 또 보자”하며 집으로 올라오는데 그 녀석도 어기적 어기적 계단을 따라 올라오려고 했다. “엇! 아니야!” 하며 깜짝 놀라 손을 크게 휘저었더니 그때서야 그는 무안한 얼굴로 멈칫거렸다. 작은 녀석은 집에 들어오더니 “데려다 키우면 안 되느냐”며 그만 훌쩍이고 말았다. 큰 녀석의 먼지(털) 알레르기 때문에 우리 집 방침은 무조건 “NO”다. 아빠랑 엄마는 “내일 아침에 먹을 것을 조금 가져가자”라며 달랬다.
‘과연 그 까만 개가 내일 아침에도 다시 나타날까?’
그 개가 뭘 좋아할지 고민하는 작은 녀석뿐만 아니라 사실은 우리 가족 모두가 다음 날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데려다 키우면 안 될까?” 학교에 다녀온 후에도 둘째는 까만 개 생각뿐이었다.
다음날부터 우리 식구들은 그 까만 개를 “깜두리”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인도에서 한국말로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 우리의 첫 친구가 되었다.
(*) 석가모니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 즉 깨달음의 싹이 있다’라고 설했다.
그런데, 진나라 때 문원(文遠)이라는 수행자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조주(趙州)라는 스님께 물었더니, 이 스님은 “없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한다. 이를 계기로 문원 수좌가 득도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