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의 성지, 프랑크푸르트
'제발 오늘은 쉬게되길, 딱 오늘까지만..' 스케줄표에 4일연속 홈스탠바이(집에서 대기하며 다른 승무원이 비행을 하지 못할 경우 그 자리를 대신해서 채우는 스케줄)를 받았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나흘이라니 불안정한 스케줄이 영 탐탁지않았다. 보통 홈스탠바이는 승무원들이 꺼리는 비행에 불리기 마련이니까. 밤늦게 집에서 조마조마 하며 지난 여행을 글로 정리하고있는 와중, 갑자기 휴대폰이 울린다. "You have a roster change. Please acknowledge it.(스케줄이 변경되었습니다. 확인해주세요.)" 그래, 그럼 그렇지. 피하지 못했으니 또 한번 흘러가보자 싶어 차분히 스케줄을 펴본다. 어라? 그런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잖아. 목적지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인기 취항지 중 한곳이었다.
밤비행이라 승객들은 모두 잠에 깊이 빠져들었고, 업무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구나 하며 앉아있는데, 동료들이 "Lucky girl!(운 좋네!)"하며 한마디씩 던져주니 괜시리 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보통 여행 전 뭘 할지 미리 계획을 세워두는 편이라 막막한 마음은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선배 중 한명이 같이 나가자고 제안했고, 정말 반가운 마음에 1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두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프랑크푸르트는 대표적으로 현대화된 상업도시다. 소위말해 쇼핑에 눈이 데구르르 돌아가기 딱 좋다. 선배는 시내를 향하는 기차역에서 휴대폰의 메모장을 켜더니 얼굴에 불쑥 갖다댔다. '크림, 치약, 영양제, 빵, 과일, 채소, 옷, 입욕제..' 아, 정신 똑바로 안붙잡으면 여기서 엄청 탕진하겠구나 싶다. 사실 딱히 필요한건 없지만 뭐가 유용하고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을때 가족과 친구들이 아른거려 나도 모르게 카드를 긁게 된달까.
기차역에서 나와 3분 정도 걸으니 우뚝 솟은 쇼핑몰과 상점들, 그리고 그 사이에 하늘하늘 춤을 추는 넓직한 이파리의 푸른 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더구나 주말이라 광장에는 마켓이 형성돼있었는데 왠지 우리나라의 오일장같은 느낌이었다. 식료품부터 기념품, 의류, 독일의 생맥주 뿐만아니라 다양한 먹거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숯불에 구워주는 소시지빵에 구미가 당겼다. 한손에는 갓 구운 소시지빵, 다른 손에는 와인가게에서 산 백포도주스를 들고 파라솔 밑의 벤치에 현지인들에 섞여 앉았다. 입안에 와앙 들어오는 건 무엇보다도 여행의 맛. 행복이 솔솔 퍼진다.
날은 더웠지만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상쾌했다. 이대로는 아쉬워 꾸덕한 초코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쇼핑몰로 향한다. 프랑크푸르트에는 정말 없는 게 없다. 모든 브랜드가 다 모여있는듯 했고, 선배는 이번엔 여기, 다음엔 저기 하며 이미 길도 꿰뚫고있었다. 나 또한 우려가 현실이 되어 할머니를 위한 그릇 세트부터 부모님께 드릴 비타민 크림, 친구들에게 줄 영양제까지 야무지게 쟁였다.
세시간쯤 지났을까, 어찌나 걸었는지 또다시 허기가 졌다. 이번에는 중앙쪽에서 살짝 벗어나 구시가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생맥주 한잔은 마셔야지 않겠냐는 선배의 말에 보고싶은 아빠의 얼굴이 아른아른했다. 우리 아빠, 참 맥주 좋아하는데. 아빠가 좋아하는걸 나만 한다고 생각하니 조용히 찾아오는 씁쓸함. 살짝 처질뻔했지만 웨이터의 우렁찬 목소리와 표정에 툭하고 털수 있었다. 저녁은 추천받은 맥주 두잔과 오늘의 메뉴인 참치샐러드. 가볍고 풍미가 좋았다.
분명 이번 달이 시작할때 돈 좀 아껴볼까 했는데 또다시 지갑은 얇아진다. 너무나 명확한 행방이라 할말은 없다. 그래도 나누면 좋잖아 하며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올때는 가볍게, 갈때는 무겁게. 프랑크 푸르트, 정말 좋지만 자주 보지는 말아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