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색 하늘 아래 상파울루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발을 디딘 남미땅은 브라질이 되었다. 그 중에도 라틴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 상파울루. 브라질 하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몇몇있다. 녹색 바탕의 국기와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카니발 속 화려한 사람들. 영화 속에서 가끔 이런 장면이 나오면 그 속에 섞여 함께 춤을 추는 나를 그려보곤 했다. 하지만 조금 아쉽게도 남반구의 브라질은 현재 겨울인지라 축제를 즐길순 없었다. 아무렴 어때, 슈하스코(브라질식 꼬챙이 스테이크, 구운 직후 통째로 가져와 테이블에서 직접 썰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의 고장에서 오리지널을 배터지게 즐기고 와야지!
14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브라질은 생각보다 어두운 하늘로 맞이해주었다. 왠지 기를 죽이는 듯한, 들뜬 나에게 차분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모습이었다. 주로 혼자 다녔던 나지만 이번엔 마음맞는 태국인 동료를 만나게 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 상파울루에서 가장 유명한 슈하스코 전문점 중 하나라고 열변을 토하는 친구를 보며 가는 길 내내 침을 꼴깍 꼴깍 삼켰다. 일요일이라 꽤나 많은 사람이 있을테지만 꼭 끝까지 기다리자고 우린 입을 모았다.
드디어 도착한 식당. 유명맛집 답게 웨이팅은 길게 늘어서 있었고 우리는 얼른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20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차례가 되어 안으로 들어서니 굉장히 넓은 실내에 향긋한 허브와 고기향이 고소하게 배어있었다. 한쪽에는 뷔페식으로 갖은 채소와 과일, 여러 사이드 요리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Ola(안녕)!" 밝은 미소로 맞아주는 웨이터는 둥그런 종이 컵받침을 내밀었다. 한면은 초록색, 반대쪽은 빨간색 종이었는데, 고기를 먹다가 잠시 멈추고 싶을때 붉은면이 위에 오도록 두면 웨이터들이 서빙을 멈추는 시스템이었다. 이런 이국적인 느낌, 딱 좋아!
돼지, 소, 양, 닭고기로 이루어진 스테이크는 고기의 종류 이외에도 다양한 부위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한참을 먹고나니 조금 배가 부른 듯 해 테이블로 온 직원에게 그만 줘도 된다고 신호하자, 그래도 이 닭다리는 꼭 먹어봐야 한다며 접시에 냉큼 올려두었다. 이런 '정'. 내겐 너무 익숙한 정서라 나도 모르게 씨익 웃으며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했다. 맛있게 먹고 후식으로 달콤한 케이크와 아이스크림까지 쭈욱 달렸다. 배가 뻥하고 터질것 같아 소화를 위해 많이 걸어야겠단 맘이 한가득. "상파울루에 유명한 대성당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 이미 모든걸 계획해둔 태국 친구는 자기만 믿으라며 엄지를 척 올린채 택시를 불렀다.
택시 기사님은 나이가 조금 있어보이는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관광객인 우리를 슥 보고는 갑자기 열성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어였기에 전혀 알아들을수 없었다. 혹시 영어로 얘기를 할수 있냐 여쭤보니 "No, English!"라고 한 후 다시 소리를 높여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체 무슨 말을 전하고 싶어 이렇게까지 열변을 토할까. 궁금함에 휴대폰 번역기 어플을 꺼냈다. 그녀의 말을 번역하자, 현재 브라질은 전례없는 수의 노숙자들로 가득해 소지품을 조심하고 절대 혼자다니지 말라는 것이었다. 남미가 치안이 좋지 않은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이렇게까지 강조 또 강조해주니 괜시리 겁이 났다.
하지만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즉시 실감할 수 있었다. 비유를 하자면, 길 위에 평일 저녁 번화가 정도의 사람수가 모두 노숙자라고 보면 되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수의 노숙자들이 곳곳에 텐트를 치거나 깔개를 깔아두고 있었고 우리를 향해 시선을 오롯이 고정해두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팔짱을 꼭 끼고 성당 입구 계단을 올랐다. 곳곳에 경찰차와 총을 메고 있는 경찰들이 경비를 하고 있으니 하늘색은 더 회색빛 검게 보였다.
대성당은 마치 유럽의 건물들 처럼 섬세하고 고풍스러웠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다른곳을 향해 있었다. 건물 밖 들끓었던 집없는 사람들. 그 중엔 어린 아이도 있었고 가족단위로 보이는 무리도 꽤 있었다. 성당에 앉아 기사를 몇개 조회해보니,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이곳 노숙자의 수가 30%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브라질 내에서만 8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물가는 치솟았으며 1200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그 때문에 인구의 절반 이상인 1억 1700만명이 식량 불안정을 경험중이라 한다. 나에겐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정부에서도 지원하는게 힘들 정도의 상황이라고 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똑같은 지구에서 똑같이 태어나서 이토록 다른 삶을 사는 모습을 보니, 감사함은 커녕 미안함이 찾아드는건 왜일까. 우리는 아무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다 다음으로 가려고 했던 곳은 취소한뒤 얼른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호텔밖으로 지나다니는 차들, 그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멍하니 숙연함에 파묻힌다. 내게는 당연했던 삶들을 다시금 곱씹는다. 한참을 그러다 지는 해와 함께 저물어가는 하루를 미련담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