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는 누군가와 함께 타면 좋은 점이 많다. 차도에서 무리를 만들어 달리면 조금 더 안전하기도 하고 바람을 막아줘 힘을 아낄 수도 있다. 함께 하다 보니 훨씬 빠른 속력으로 멀리 갈 수 있게 된다. 장거리에 문득문득 찾아드는 외로움도 막아주고 사고 시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라이딩의 목적이 빠르게 멀리 가는 게 아니라면, 외로움보다 어울리는 게 더 피곤하다면 함께 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가족과 라이딩이 가장 좋다. 제 속력을 못 내 몸이 근질거릴 때가 많지만 훨씬 큰 즐거움이 대신한다.
아들은 좋은 파트너였지만 국토종주를 함께하고 나서 중학생이 되더니 웬만해서 함께 타 주지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해주겠다며 아내가 나서 줬지만 동해안 종주를 함께하고 나서는 라이딩만 하면 여기저기가 아프다 한다. 괜히 장거리 라이딩을 무리하게 도전해서 질려 버린 건 아닌지 반성도 든다. 자전거가 좋으면 어떻게든 타야 할 상황이 만들어지지만 싫으면 수없이 많은 타지 못하는 이유가 생긴다. 아들도 아내도 자전가가 싫은 가보다. 그렇다고 동호회에 다시 나가려니 관계, 배려, 비교들에 꺼려진다. 특히 주말을 가족 없이 남들과 보내는 것은 개인적으로 옳지 않다. 더구나 미술관에서 일하다 보니 주말 근무가 잦아 결국 혼자 라이딩을 많이 나가게 된다.
혼자 버스를 타고 원주로 가서 섬강 라이딩을 나간 적이 있다. 남한강으로 접어들어 국토종주 때 아들과 함께 휴식했던 공원에 들렀다. 사진으로 남겼던 아들의 모습처럼 난간에 기대 강을 봤다. 저녁에 집에 가서 만날 아들이었지만 괜한 감상에 빠져 그때의 아들을 떠올리며 뭉클했다. 아들에게 얘기하면 또 자전거 이야기라며 싫어하겠지.
자전거가 싫어서 자전거 이야기가 듣기 싫은 게 아니라 자전거 이야기를 너무해서 자전거가 싫어진 거겠다. 아내와 아들은 틈만나면 어김없이 자전거를 타자고 조르는 내가 싫었겠다. 아들에게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아내에게는 비싼 자전거 아깝다며 라이딩을 강요했다. 어린 딸까지 라이딩은 뭔가 보상이 있어야 하는 시간으로 취급한다며 섭섭해했다. 자전거가 좋은 건 가족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자꾸 요구하다 보니 자전거를 요구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타라 하면 더 타기 싫은 게 아니라 강요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더 강요하고 있는 자전거. 사실은 내가 청개구리 짓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