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를 보고 든 생각
‘주제 사라미구’가 쓴 책이 원작인데, 영화로도 나왔다. 나는 책과 영화를 모두 보았다. 사실 소설은 호흡이 너무 길고, 도대체 작가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 너무 답답해서 잘 읽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나는 하필 군대에 있었고, 그때는 소설도 재미있었으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책은 원래 재미있는 책이라서 대중성도 있는 작품이었다. 생각 없이 읽었는데, 너무 사실적인 묘사들이 많아서 오래도록 머리에 남아있었다.
주인공은 안과의사와 그의 아내다. 어느 날,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리는 병에 걸린다. 안과의사의 아내만 빼고. 홀로 앞이 보이는 안과의사의 아내의 도움 없이는 모두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행히 안과의사의 아내는 친절한 사람이었고, 그녀의 도움으로 많은 이들이 무사히 밥도 먹고, 대소변도 가리고,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누렸다.
영화에는 잘 묘사가 안 되어있는데, 책에 이런 부분이 있다. 평소와 같이 퇴근해서 저녁 식탁에 앉은 안과의사는 아내에게 본인이 오늘 진단한 환자의 특이한 질병을 대충 얼버무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있다. 아내는 저녁을 차려주면서 남편에게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물었고, 남편은 오늘 본인이 맡은 환자 중에 있었던 특이한 사례를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어차피 힘들게 설명해 봤자 아내는 못 알아들을게 뻔하니 일반인의 호기심을 대충 충족시킬 정도의 수준으로 설명해주고 만다. 그리고는 저녁이 참 맛있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고, 방에 들어가 본인이 진단한 특이한 질병에 대한 연구를 이어간다. 남편을 배불리 먹인 아내는 피곤하다면서 먼저 자겠다고 말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아내를 무시하는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본인의 뛰어난 의학지식은 고결하고 중요하지만,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하찮은 것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아내는 밥상만 차려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헌신과 책임감이었다. 그것은 남편이 똑똑한 의사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그것을 아는 것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내에게 충분히 감사하기보다는, 본인이 발견한 특이한 질병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남편은 눈이 멀자, 아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이 멀었을 때, 그 잘난 의학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아내의 도움에 그저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라미구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머리 좀 컸다고, 글 꽤나 읽었다고, 돈 좀 번다고, 우쭐거리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사라미구는, 우리 모두 눈이 먼 사람과 같을 때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갓난아기일 때, 다 큰 어른이 된 후에도 마음에 큰 구멍이 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나이가 많이 들어서 제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철저히 무기력해지고, 눈이 먼 사람과 같이 된다. 그때 우리를 살려내는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 똑똑히 기억하라고, 사라미구가 내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그 무기력함 속에서, 네 스스로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내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아무리 잘나도 그래 봤자 넌 결국 한낱 인간에 불과해서, 절대 혼자 버틸 수 없다고 말이다.
박노해가 쓴 ‘하늘’이라는 시에 이런 글이 있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겠지”
아기들에게는, 엄마 아빠가 곧 하늘이었다. 아기에게 딱 맞는 온도의 분유로 채워진 젖병을 물려주는 손길 없이, 예쁘다고 말해주고 쓰다듬어주는 손길 없이, 옷 입혀주고 씻겨주는 손길 없이, 아기들은 살아갈 수가 없다. 학생들은 더 높고, 크고, 가치 있는 꿈을 이루려고 공부하는데, 사실 우리를 여태 키워놓은 것은, 그다지 멋지고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 사랑의 손길이었다.
가까운 이의 죽음, 좌절, 실패, 실연의 아픔, 회의감, 무의미함, 격정, 분노, 질병. 이것들은 씩씩하게 혼자서도 잘 살 것 같았던 사람들의 마음에 크나큰 구멍을 후벼 파고도 남는다. (사실 아직 어려서 잘 모르고요, 그냥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삽니다.) 나도 아직 어려도 꼴에 힘들다고 자주 한탄하는데, 그때 정말 필요한 건 전화할 수 있는 친구였고, 그런 날 받아주는 친구의 마음 한 켠이었다. 친구의 배려와 관심과 따뜻함은 내가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친구가 날 받아준 것뿐.
새내기 때에 자주 읽던 존 스토트 할아버지의 많은 책들 중에, ‘제자도’라는 책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존 할아버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 여느 때와 같이 주일 예배를 위한 설교를 준비해서 방 밖으로 걸어 나가려다가 침대에 걸려 넘어졌다. 이미 나이가 굉장히 많았던 존 할아버지는 넘어지면서 다리뼈가 부러졌고, 심한 고통 속에서 벽에 설치해 두었던 비상벨을 눌러 집 근처에 있던 간호조무사의 도움을 받아 일어났다. 그 순간 존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때의 감정이 어떠했는지는 서술하지 않았지만, 아마 정말 정말 외롭고, 서럽고, 무기력하지 않았을까. 이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엄청 잘 나가는 신학자였고, 죽기 직전까지 영국 기독교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쩌면 존은 왕성한 집필활동을 통해서 본인의 나이 듦을 부정하며 살아오다가, 다리가 부러지고, 조무사에게 끌려 나가면서 비로소 본인의 무기력함을 실감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대단한 것이, 존은 이 경험을 살려 또 글을 써냈다. ‘겸손’에 대한 글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겸손하게 하시려고, 나이가 들었을 때 철저히 무기력하게 만드셔서,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게 하신다고 말이다. 존은 독신이라 가족이 없었지만, 침대에 누워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임종을 맞았다.
사라미구는 인간이 한없이 무기력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이 멀어버리게 했던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 극복해 볼 수조차 없는 막다른 길, 그것을 사라미구는 ‘실명’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결코 스스로 일어설 수 없다. 그리고 사실 그 자리에 오기까지도 결코 너 스스로가 잘나서가 아니라, 네가 잘나기 전에, 혹은 잘난 와중에도 너를 받아주고 용납해 준 관용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니 혼자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말아라. 뭐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아닐까. 아님 말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오늘 다시 한번, 세상이 말하는 멋지고 간지 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살다가, 나를 키워주고 살려주는 소중한 사랑을 놓치며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하고 싶다. 함께 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