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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명 Apr 04. 2024

여름, 소나기, 달리기 그리고 맥주

2023 홋카이도 마라톤

팽팽함은 끊어짐의 전조이다. 강한 반발력을 위해 테니스 라켓의 스트링을 팽팽하게 조이면 끊어질 가능성 또한 커진다. 사람이 그러하다. 장시간 텐션을 유지하다 보면 결국 어딘가 사달이 난다. 그래서 최고의 텐션은 일시적이어야 한다. 밀당의 미학이 삶에도 필요하다.

봄에 두 개의 대회를 마치고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밀린 일들과, 지연시켜 둔 약속들과, 업무상 성수기의 나날들. 미미하게나마 우상향 하던 몸 상태가 완전히 ‘리셋’되어 버렸다. 그렇게 초기화된 상태로 6월을 맞이했다. 가을에 목표한 대회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고, 까마득한 그 과정을 다시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런 느낌. 엘리베이터도 없는 63 빌딩 꼭대기에 겨우 도착했는데 핸드폰을 1층 로비에 두고 왔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계단을 내려가면서 상상한다. ‘하. xx 저길 다시 어떻게 올라가지?’ 당시의 내 마음이 딱 그랬다. 나름의 최선을 담았던 4개월여의 성과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는데, 무엇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하루면 녹아버릴 눈사람이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퍽 오래 쉬게 될 것 같은 예감. 뛰지 않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부정적 감정들을 극복하기 위한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그렇게 고민을 이어가는데 인스타가 귀신같이 광고를 보여준다. '브룩스와 함께하는 다낭 마라톤'. 파리 마라톤의 감동이 어마어마했던 탓일까. 광고를 보자마자 다시 해외로 나가고 싶어졌다. 그래 해외 마라톤을 뛰자, 천천히 장거리 훈련 삼아 하루 달리고 관광도 하자. 그런데 8월의 다낭은 너무 덥지 않을까. 링크의 바다를 서핑하다 결국 마주친 홋카이도 마라톤. 여름이 시원해서 일본사람들이 피서지로 많이 찾는다는 멘트가 눈에 딱 들어왔다. 일본 선수들이 여름 전지훈련으로 홋카이도로 간다는 말도 보였다. 심지어 2022년 도쿄올림픽 레거시 코스. 킵초게가 뛰었던 그 길을 뛸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달리기가 재미있어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충동적으로 대회를 신청하고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해 버렸다. 와이프를 설득하고 여기저기 허세를 부리고 나니, 진짜로 달리기가 하고 싶어졌다. 완주라도 하려면, 마일리지를 쌓아야지. 완주라도 하려면 하루라도 금주해야지. 그런 마음으로 2달 반을 꾸역꾸역 달렸다. 달려온 거리가 쌓일수록 조금씩 몸도 올라왔다. ‘잘하면, 아니 이만하면 완주정도는 할 수 있겠다. 욕심내지 말고 장거리 훈련을 한다 생각하고 즐기고 오자. ‘라는 마음으로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삿포로의 기온이 33도를 넘는다. 20도 근처의 선선한 가을날씨라고 했는데. 이건 뭐 아침 기온도 30도가 넘는다. 대회 전날 배번을 수령하려 엑스포장에 가는 길에는 34도까지. 태양이 강한 낮시간에는 주민들도 몇 보이지 않는다. ‘이라면 나가린데.. ‘ 밤을 새워도 끊기지 않는 걱정을 붙잡고 출발선에 섰다. 온도는 30도. 4시간 뒤에 비가 예보되어 있긴 했다. 비를 맞는 게 좋은 걸까. 그전에 대회를 마치는 게 좋은 걸까. 어차피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고민을 하며 스타트. 삿포로 시내 한가운데를 지나는 기분이 나쁘진 않다. 사회자가 외치는 일본말 사이로, 도쿄 올림픽 레가시 코스 이런 단어가 들린다. 그래 나는 킵초게가 뛰었던 그 길을 뛰는 거지. 간바레!! 하지만 속도는 나지 않는다. 고온 때문인지 10킬로 정도부터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쉬지 않고 계속해서 달리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5~6분을 달리고 1분 내외를 걷는 런-워크-런 주법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급수대는 생존경쟁의 현장 같았다. 다들 몇 컵씩 물을 마시고도 열이 식지 않아 머리와 몸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대회 후기들을 살펴보니, 뒤에 오신 분들은 이미 텅텅 비어버린 급수대를 마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중간중간 과일과 얼음물을 가지고 나와 응원해 주신 시민들 덕분에 겨우 대회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역시 마라톤은 해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홋카이도는 눈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오겡끼데스카'의 눈 덮인 언덕은 물론이고, 삿포로 시내 곳곳도 눈으로 가득 찬다. 마라톤 출발지였던 오도리 공원은 겨울이면 펼쳐지는 눈 축제 행사장으로 유명하다. 지역의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년에 곱게 챙겨 둔 눈송이를 대회 중간에 나눠준다고 안내장에 쓰여있었다. ‘한 여름에 만나는 첫눈이라니 너무 낭만적이야. 이건 8월의 크리스마스 급인걸’ 내 마음대로 상상해 버린 착각. 25킬로미터 지점을 지나서 받은 눈덩이는. 뽀송뽀송한 눈 뭉치가 아닌 이미 녹기 시작한 자잘한 얼음조각이었고, 나는 낭만 따위는 뜻 도 잊어버린, 황야의 태양과 싸우다 붉게 타버린 러너. 하나씩 주는 눈덩이를 하나 더 뺏어서 얼굴에 문지르고, 목뒤를 문지르고, 남은 건 진짜로 뜯어먹었다. Fucking global warming!! 그래도 내년의 주자들을 생각하며 한 스쿱, 한 스쿱 냉동고에 눈을 보관하던 그 마음이 고맙지 않은가. 야수처럼 눈뭉치를 낚아채는 나를 향하서도. 웃으며 간바레라고 외쳐주는 그 미소. 걷다가도 뛸 수밖에 없게 만들어준 수많은 카메라와,  화이또, 간바레를 외쳐주던 수많은 시민들. 호수로 물을 뿌려주던 상인들. 며칠을 연습했을 고적대와 응원단. 아리가또 삿포로.

[얼굴과 목에 열을 식히고나니 눈덩이가 작아졌다. 씹으면 물 맛이 난다]




피니시를 1킬로미터 정도 남겨둔 지점,  홋카이도 대학 가로수길에서 쏟아지던 소나기. 소나기, 대학, 여름, 삿포로. 어떤 단어를 말해도 가장 먼저 떠오를 기억. 이미 4시간을 좀비처럼 걷다 뛰다를 반복하는데 벼락처럼 비가 쏟아진다. 더위를 순식간에 녹여버린 굵은 빗줄기. 잘 정돈된 가로수길. 나뭇잎과 연못과 흙바닥과 콘크리트 길을 때리는 각기 다른 빗소리. 김연수 님의 문장처럼 어떤 빗소리는 ‘솔’과 같았고 어떤 빗소리는 ‘미’와 같았던 시간. 1분 빨리 들어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낙오를 대비해 들고뛰었던 핸드폰을 꺼내 영상을 찍었다. 비가 내리는 속도보다 빠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기운이 솟구치고 웃음이 지어졌다. 웃으며 뛰니 쥐도 나지 않는다. 가장 밝은 표정으로 들어온 결승점. 전지훈련이었다가 극기 훈련이었다가, ‘싱잉 인 더 레인’으로 마무리된 레이스. 그리고 Beer after Marathon. 한 여름 더위에 꾸역꾸역 달려왔을 러너들의 마음을 예상했을까. 대회종료 기념품으로 마라톤 로고가 박힌 주석컵을 나눠준다. 차가움이 그대로 느껴지는 얇은 컵에 차가운 삿포로 맥주를 가득 채워 마신다. 하루키도 울고 갈 그 맛. 단숨에 들이켠다. 그 한 잔을 위해 견디어 냈던 많은 날의 훈련과, 4시간의 폭염뒤에 억수같은 소나기. 그리고 골이 띵할 정도로 차가운 맥주. 그 한 잔의 맥주보다 맛있는 맥주를 앞으로 나는 또 마실 수 있을까? 달리기를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맥주를 맛있게 마시기 위해 달린다. 하루키 스러운 허세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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