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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명 Jan 12. 2024

취미러너에게 거제도를 권합니다.

제5회 거제섬꽃마라톤

거제는 18개월을 근무한 지역, 제4의 고향쯤 되는 곳이다. 울산 근무 당시와는 다르게 마침 주 52시간이 강하게 적용되던 초창기여서 여유가 좀 있었다. 덕분에 산지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맛집과, 바다 전망 가득한 커피집들도 찾아다닐 수 있었다. 거제는 수협탄생의 고장답게 신선한 해산물들이 철마다 나는 고장이어서, 때를 맞춰 식도락 모험을 떠나는 재미도 쏠쏠했었다. 봄이면 도다리 쑥국, 코끼리 조개를 찾아먹고, 여름이면 하모회를, 사이사이에 갑오징어, 가을 초입에는 전어, 가을 좀 지나면 굴과, 겨울에는 대구까지 거제 지역 곳곳의 로컬 맛집을 찾아다니곤 했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매해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즈음이면, 모든 주로가 바다와 바로 접해있는 산달도 7킬로미터 환주를 하고 인근 거제면에서 굴구이 코스를 먹는 게 일종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거제도의 바다는 대부분 파도가 치지 않는 잔잔한 바다인데 그로 인해 예로부터 조선업이 발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산달도를 달리면 파도는 없지만, 그래서 소리도 없다. 고요함 속에서 물 위로 반짝이는 태양, 시원시원한 섬 전망과, 간간이 왕래하는 고깃배들을 바라보며 달릴 수 있다. 이런 장면을 ‘평화’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편안하고 차분한 가운데 천천히 가빠오는 숨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그 섬에서의 달리기를 좋아한다. 가볍게 땀을 흘리고 먹는 생굴 무침과 소주 한잔까지 더 해지면 1년에 몇 번 없는 행복의 결정체 같은 순간을 만끽할 수 있다.

[평화로운 산달도와 3/4인에 7만으로 충분한 굴 코스 요리]

그런 거제에서도 해마다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5K 건강 달리기와, 10K와 하프코스가 전부인 지역 대회지만, 국토 최남단, 한려수도에서 열리는 대회라는 점 만으로도 충분한 매력이 있다. 대회에 참석할 예정이라면, 일정을 좀 넉넉하게 잡으시고 기를 추천한다. 인근 통영과 고성, 거제의 숨겨진 관광 명소들을 둘러보고 가는 말 그대로 런&트래블이 가능한 도시. 두 발로 도시를 몸에 새기고, 맛있는 음식으로 기억과 위에 저장하는, 언제 떠올려도 흐뭇해질 추억. 살아온 기억의 총체가 ''라는 존재라는데, 좋은 기억 하나 더 쌓아주면 더 좋은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달리기 얘기를 하면서 너무 많이 나갔다.


보통 달리기를 하면 다리는 무거워지고 마음은 가벼워진다. 하지만, 그날 만은 모두가 무거운 마음으로 달렸던 하루였다. 21세기 메가시티에서 일어날 것이라곤 꿈에도 상상 못 했던 비현실적인 압사사고가 일어난 다음날, 제5회 거제 섬꽃 마라톤대회가 열렸다. 나는 간 밤의 사고 소식을 대회장 도착해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당장엔 믿을 수가 없어 설마라고 흘렸던 기억이 난다. 전국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편에 속할 섬마을에서도 압사사고를 조심하라고, 사고를 조심하라고 멘트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요란한 음악등은 상당 부분 생략된 로 행사는 진행되었고 달림이들은 차분한 가운데 각자의 레이스를 시작했다.

[21세기 메가시티에서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R.I.P.]


지방 도시들의 대회를 달리다 보면 유독 언덕이 많이 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현상인 게, 우리나라의 70%는 산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나마 평지가 있는 곳들은 광역시에 속해 있을 것이며, 상대적으로 빈약한 시티뷰를 보여줄 필요가 없는 지방대회에서는 풍광이 좋은 길들을, 혹은 도로 통제가 용이한 길들을 마라톤 주로로 선정할 것이다. 다운타운을 관통하는 코스가 없다면. 무조건 상당한 오르막이 있다고 생각하고 각오를 다지는 게 맞다.


거제섬꽃 마라톤도 몇 번의 거친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난코스인데, 코스 처음부터 끝까지 걷지만 않아도 100위안에 입상은 무조건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되는 것 같다. 100위라는 순위가 이 대회에서는 나름의 큰 의미를 가지는데, 무려 100위까지 선발하여 트로피를 지급하기 때문이다. 아마 달리기 인생이 끝날 때까지 입상할 가능성이 없을, 나 같은 대부분의 취미러너들에게는 그래도 달리기 대회에서 받은 트로피 하나를 집에 가져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감격에 겨워 눈까지 감았다.]

기술 도핑이라 불리던 카본이 장착된 신발의 힘을 빌어 겨우 겨우 걷지 않고 완주를 했었고, 10킬로 부분 40위라는 나름 훌륭한 성적으로 입상에 성공했다. 대회에는 달림이들의 영웅 이봉주 선수도 내빈으로 참석했는데, 실제로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된 시점이기도 하였다. 아직 제대로 서있기도 힘겨운 상태셨지만 축사를 할 때는 그래도 일어서서 웃으며 격려를 해주셨고, 기록증에 사인도 해주셨다. 다시 달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실까. 주로에서 이봉주 선수와 잠시라도 함께 뛰는 게 나름의 달리기 목표이다. 사실 이봉주 선수 본인은 모르겠지만 잠시 함께 달렸던 10 초남짓의 시간이 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집 근처 도로를 달리는 이봉주 선수를 보고 어린아이처럼 따라 뛰었던 기억인데, 내 달리기 인생의 행복한 마일스톤 중에 하나이다. 이번에 같이 함께 하게 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운 좋으면 몇 번의 눈 빛과 따봉도 주고받으면서 달리고 싶다. 얼마나 행복할까. 이미 상상만으로도 몇 번 행복했으니, 이봉주 선수가 꼭 이겨내고 주로에 서기를 응원한다.

[이봉주 선수와 다시 달릴 그 날이 꼭 오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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