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몇 가지쯤 사소한 ‘자설(自說)’을 지니고 산다. 당신에게도 분명 있을 것이고 내게도 물론 있다. 내 경우는 그 설이 성립되는 범위가 마이너랄까, 상당히 한정된 것이어서 세간의 넓은 공감을 얻기는 어려운 것 같지만’
하루키의 에세이에 나오는 문장이다. 저 문장에 이어서 마빈 게이와 타미 테렐의 ‘유어 프레셔스 러브’ 후렴 부분을 들은 사람과 못 들은 사람은 사랑의 감동에 대해 반응하는 정도가 다르다던가, 정차하기 직전에 1초가량 조명이 꺼지던 긴자선을 타 본 사람과 아닌 사람은 인생의 암전에 대한 각오가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던가와 같은 자설을 설파한다. 뭐 좀 오글거리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뭐. 자설은 개인의 것이니 그리고 하루키가 뭔 말을 한들 감응하는 사람들이 수 만 명은 있을 건데 뭐. 아무튼
‘자설’이라는 단어가 알 듯 말 듯해서 검색을 해봤다. '자기의 학설이나 주장’. 나는 학자는 아니니 당연히 가지고 있는 학설은 없고, 삶의 대한 사소하고 진지하지 못한 이론은 몇 개 가지고 있긴 하다. 먼저 ‘천 원 이론’. 천 원 이론은 옷 값에 대해, 가난한 대학생 시절 만든 이론이다. 옷을 입을 때의 효용을 회당 ‘1천 원’. 예를 들어 3만 원짜리 옷은 30회를 입으면 이제 손익분기점을 넘어서게 된다는 말이다. 뭐 자세하게 하자면 상의와 하의. 재킷과 신발 이런 항목별로 가중치를 다르게 두는 게 맞지만 어차피 옷이라고 할 것도 몇 벌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퉁 쳐서 ‘천 원 이론’. 술 마실 돈이 아까워 옷을 사지 못하던 찌질한 청춘의 고민이 담긴 주장. 마시고 없어지는 소모성 비용이 아닌, 잔존가치가 남는 옷을 사는 게 오히려 경제적이라고 말하던 당시의 여자친구와는 길게 사귀지 못했다. 아마도 저따위의말을 연인 간의 대화라고 시도하는 남자가 견딜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왜 저런 반낭만적인 대화들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머리를 쥐어짜다 찾아낸 결론. 부자가 되는 방법을 기대하고 지원했던 ‘경제학’이라는 전공이 문제였다. '비용'과 '효용' 용용 거리며 좌변과 우변을 오가는 숫자들의 댄스댄스.
경제학과 졸업생들은 맛집이라고 찾아간 식당에 가서도 테이블 수와 객단가를 계산한다. 회전량을 관찰하고 나름의 임대료와 재료비 기타 부수비용을 추산해 본다. 그리고는 한 달에 500 정도는 가져가겠구나. 휴일도 없이 직접 일을 하고 하루에 16시간 정도니. 16시간 곱하기 30일. 시급으로 치자면 만원이 조금 넘는 일을 하고 계시는구나. 역시나 자영업은 난도가 높은 직업. 대한민국의 자영업 비율이 OECD대비…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이야기를 이어가곤 했다.
아직도 저런 버릇이 남아서 식당에 동행한 사람들에게 재수 없다는 소리를 종종 듣곤 한다. 밥 맛 떨어뜨리는 경제학 따위. 물론 추측일 뿐으로 계산이 맞아 들어가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식당주인에게 이 계산이 맞냐고 물어본 적은 없다는 사실. 그 정도의 사회성은 배우고 나왔으니 경제학이 완전히 쓸모없는 건 아닐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