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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경계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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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사리아 Sep 14. 2023

1.

분홍색 니트

얘!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아다닌 줄 아니? 암암리 소문으로 알았지. 네가 그렇게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며? 너와 이야기하고 나면 속이 뻥 뚫린 느낌이라던대? 내가 좀 갑갑한 게 많아서 말이지. 뭐야, 초면에 실례라는 듯한 그 질린 얼굴은. 나 상처받았어. 됐어. 아무렴 어때, 아니, 글쎄 일단 이리 와서 앉아 내 얘기 좀 들어 봐.  



희영은 저녁을 먹고 산책할 요량으로 가볍게 집을 나섰다. 막 9월에 접어든 가을의 밤은 선선했다. 한낮은 아직 체감 30도에 가까운 여름이건만, 밤이 되면 표변하는 이 계절은 몇 해를 맞이해도 낯설다. 여름과 가을 경계에 선 초입인 탓도 있겠지. 이제 곧 완연한 하나의 계절로 자리 잡을 것이다. 스치듯 지나가는 가을이 끝나면 곧 겨울이 온다. 생각만으로도 희영은 벌써부터 한기가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늘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것이 걷기에 딱 좋은 온도라 평소보다 좀 더 멀리까지 가기로 했다. 희영은 주택과 상점이 오밀조밀 모인 주택단지의 다세대 주택 원룸에서 살고 있다. 자신의 집에서 삼십 분쯤 걸어가면 작은 공원이 하나 나오는데 그곳에는 몇 개의 운동기구와 벤치가 있다. 오늘은 그곳에 가서 잠시 앉아 쉬었다 오기로 마음먹었다. 내리막 길을 내려가면 음식점이 양옆으로 즐비한 큰 길이 나온다. 길 끝에 있는 감자탕 가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쭉 내려서 걸아가면 작은 골목이 하나 있다. 사람의 발길이 적어 날이 어둑이 내려앉으면 사뭇 스산한 느낌을 주는 골목이라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 드물다. 하지만 희영은 개의치 않았다. 이 길로 들어서야 공원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그렇게 희영이 골목을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타다닥. 


빠른 걸음으로 누군가 자신의 뒤를 쫓았다. 길을 들어섰을 때 주위에 사람 그림자를 보지 못한 것 같았는데 무슨 소리일까. 희영은 소리를 좇아 고개를 돌리다 흠칫 놀랐다. 160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여자가 어느새 그녀의 보폭에 맞춰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언제 나타난 거지? 희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머리 하나 높이의 차이. 희영을 올려다보는 눈이 동그랗게 반짝였다. 귀여운 얼굴로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오물거렸지만 쉽게 말을 걸지 못하는 듯했다. 희영은 작은 한숨을 뱉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같이 걸을까요? 혼자 걷기엔 좀 무서운 골목이죠?"

희영의 말을 들은 여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한 동안 말없이 길을 걸었다. 희영은 여자가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을 느꼈지만 딱히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말의 물고를 튼 것이 자신이니 다음은 그녀의 차례라고 생각했다. 사회성이 뛰어나 사람과 잘 어울리는 성격도 아닌 데다 자신은 산책을 즐기러 나왔을 뿐이다. 사교성을 발휘하여 상대의 안위를 살피는 일을 구태여 할 대목도 아니었다. 여자는 계절에 맞지 않게 두꺼운 분홍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 아래 하늘거리는 하얀 치마가 다리가 교차할 때마다 사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희영은 옷의 밸런스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의는 청바지로 하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을. 이 여자도 참 어지간히 센스가 없네. 살짝 통통하게 오른 살과 동그란 얼굴이 그나마 여자의 여성성에 힘을 보태어 흡사 워스트 드레서에 선정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희영은 주특기인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머릿속으로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골목 끝에 다다를 즈음 여자가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희영은 잠시 여자를 바라보다 말했다. 

"잠깐 산책 나왔어요. 저기 이십 분쯤 가면 있는 윤하 공원까지 가요."

희영의 대답에 여자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함께 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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