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경계 02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사리아 Sep 14. 2023

2.

분홍색 니트

희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일 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간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희영처럼 산책을 나왔는지 트레이닝복 차림의 사람과 퇴근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인근에 대학교가 있어 이십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기도 했다. 희영은 주위를 빠르게 스캔하고 고개를 돌려 여자에게 말했다.

"그래요. 단, 공원에 가기 전까지는 서로 말 걸지 않기로 해요. 조용히 사색하며 산책하고 싶으니까."

여자는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겠다고 답했다. 희영과 여자는 나란히 어깨를 하고 공원을 향했다. 인도에 심어진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을 밟지 않기 위해 종종 까치발을 하고 요리조리 피하는 희영과 달리 여자는 그런 것 따위 상관없다는 듯 사뿐히 발을 내디뎠다. 희영은 여자의 행동에 어쩐지 자신만 촐싹거리는 것 같아 괜히 머쓱했다. 하지만 은행이 운동화 밑창에 들러붙어 뿜어낼 고약한 냄새를 생각하니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도시의 저녁을 가로질러 둘은 공원에 도착했다. 아파트가 밀집된 단지에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연식이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로 단지가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 5단지와 6단지 사이에 있는 공원은 아파트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편의시설이었다. 운동기구는 이미 몇몇의 아주머니들이 차지한 뒤다. 희영이 먼저 공원의 가장 구석에 있는 벤치를 탐색했다. 자전거 거치대 옆에 놓인 벤치가 하나 비어 있었다. 벤치 뒤로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가로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 빛이 잘 들지 않았다. 어둠에 묻혀버린 곳이라 그런지 아무도 그곳에 앉지 않았다. 희영은 망설임 없이 벤치를 향해 걸어 가 자리를 잡았다. 여자는 그런 희영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희영의 옆에 앉았다. 희영은 조금 전 만난 일면식 없는 여자가 자신을 계속 따라오는 것을 딱히 저지하지 않았다. 일정 시간 둘 사이 침묵이 가을바람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다 잠시 뒤 바람을 가르고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제 이야기를 좀 들어줄래요?"


 희영이 고개를 돌려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정면을 응시하며 살짝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닻을 놓듯이 어깨 중심을 내려 두 팔을 양옆으로 벤치에 가져다 댔다. 기우뚱, 희영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바닥에 눈을 고정시킨 채 희영이 말했다.

"먼저 통성명부터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아, 그렇구나! 실례했어요. 저는 소담이라고 해요. 나이는 스물셋. 대학생이고요. 어… 그리고 또…. 제가 자기소개가 서툴러서. 일단 이 정도면 될까요?"

시선을 바닥에 둔 채 희영이 옅게 미소 지었다.

"뭐 그 정도면 완벽하네요. 저는 김희영입니다. 통성명이니까 이름으로 소개 끝."

희영의 대답에 소담의 볼이 약간 부풀었다. 어색함을 참고 자기는 작은 노력이나마 했는데,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라 생각한 듯했다. 희영은 여자의 부푼 볼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참았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간지러운 행동이었다. 이윽고 소담이 말했다.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렇겠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대뜸 말을 거는 사람이 흔치 않다. 대게 정신이 이상하거나, 극 외향적이거나, 아니면 참을 수 없을 만큼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거나, 그런 것이라고 희영은 생각했다. 갑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소담에게 크게 반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희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담은 잠시 침묵하다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전 01화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