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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경계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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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사리아 Sep 14. 2023

4.

분홍색 니트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게 그때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무료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 인생의 전부가 가족에 국한되어 버리면 사람은 안정적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라 쉽지는 않았어요. 사람에게 말을 걸 때면 심장이 쿵쾅거렸고 빨개지는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서둘러 고개를 돌렸죠. 눈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언감생심.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터득한 것이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기였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룹의 언저리를 맴돌다 보면 나도 그 안에 합류될 수 있었어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고 내가 아는 세상 외에 더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죠. 즐거웠어요. 


 여자는 분홍, 남자는 파랑. 여자는 남자에게 보호받아야 하며, 여성성만을 강조하던 엄마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자부했어요. 생선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고기를 좋아하는 아빠와 오빠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고기반찬을 준비하던 엄마. 오빠와 같은 물건을 가지고 싶어할 때면 늘 나에게 양보를 강요하며 착한 아이는 배려를 할 줄 아는 거야, 라고 다독이던 엄마. 나는 당신과 다르다는 것을 은연 중에 즐기고 있었나 봐요. 엄마를 싫어하냐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를 세상에 존재하게 해준, 무엇보다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에요. 비록 아빠가 얼토당토않는 일에 버럭 화를 내도 아무 말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청소년기를 맞이한 아이들에게 예전처럼 살갑게 자신을 대하지 않는다고 매일 짜증을 내는 아빠를 이해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녀를 이해해요. 세상의 전부가 가족인 사람이었기에 내면이 어찌됐건 화목함을 유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겠죠. 그런 사람인 거잖아요. 그냥. 


 엄마 이야기는 됐어요. 지금 내 이야기를 하는 거잖아요. 어쨌든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나는 사람을 좋아해요. 그들을 챙겨주고 싶어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챙겨주었어요. 생일은 물론 작은 대소사도 다 챙겼죠. 친구가 자격증 시험을 합격했다는 소식에 내 일 마냥 뛸 듯이 기뻐하며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려가서 밥을 샀어요. 시험을 준비하며 제대로 된 끼니나 챙겼겠어요? 힘든 과정을 거쳐 좋은 소식을 얻었으니 마땅히 축하해 줘야 하죠. 나의 초대에 친구는 어리둥절하며 우리가 이런 것까지 챙길 사이였던가? 하고 말했지만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어요. 친구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었고 나는 기뻤으니까요. 하지만 친구들은 내 생일조차 챙겨주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죠. 굳이 내 생일을 친구에게 말하지도 않았고 그러니 알 리도 없어 넘어간 것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허무하더라고요. 사람이 원래 간사하잖아요. 줄 때는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막상 실천은 어려워요. 주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되돌려 받고 싶은 것이 사람이에요. 이런 내가 치사한 건가요? 고마워요. 그런 건 아니라고 해줘서. 


 여느 때처럼 사람을 만나고 싶어 새로운 모임에 나갔어요. 학교에서 주최했던 모임인데 독서회, 라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토론도 하고 담소도 나누는 자리였죠. 평소 로맨스 소설을 즐겨 읽거든요. 너무 한 장르에만 치우쳐 있나, 좀 더 다양한 소재를 접하고 싶다는 욕망이 마구 꿈틀댈 때였어요. 나에게 안성맞춤인 모임이라는 생각에 주저 없이 참가했죠. 


그리고 그를 만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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