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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경계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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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사리아 Sep 14. 2023

6.

분홍색 니트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좋아하는 색을 물어봐 준 게 희영 씨가 처음이라고 했는데 정정할게요. 나 좀 봐. 이 중요한 기억을! 그였어요. 나에게 좋아하는 색이 뭔지 처음 물어봐 준 사람은. 분홍색 옷을 자주 입는 나에게 그 색을 좋아하냐고 묻더군요. 나는 아니라고 했죠. 내가 좋아하는 색은 보라색이라고. 그런데 왜 분홍 계열의 옷을 자주 입냐고 했어요. 나는 웃으며 답했죠. 여성스럽지 않나요?라고. 그가 저를 빤히 보더니 아주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했어요. 나는 뛸 듯이 기뻤어요. 내가 보라를 좋아하는 게 무슨 상관이냐 싶었어요. 아니, 나는 정말 보라색을 좋아하는 걸까? 오늘부터 내가 좋아하는 색은 분홍색이야.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로. 역시 엄마의 말은 틀린 게 없었어요. 


 우리는 자주 데이트를 했어요.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넉넉하지 못한 그를 풍족하게 채워주고 싶었어요. 좋은 옷, 좋은 신발, 그 외에 많은 선물을 했죠. 그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가 사준 것들로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꽉 찬 기분이었어요. 자취를 하는 그의 방에 찾아가서 깨끗하게 청소했어요. 하지만 다른 것은 엄마를 닮아 잘하는데 어째서인지 요리만큼은 안 되더라고요. 레시피 대로 만들어도 맛은 꽝이라 제대로 된 요리를 해준 적이 없어요. 그 대신 꼭 기념일이 아니어도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었어요. 만족하는 그를 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어느 날부터 그는 내가 해준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어요. 그가 나를 위해 요리를 해준 적이 있냐고요? 아니요. 남자들은 잘 못하잖아요. 그리고 남자들의 로망이라는 것도 있고. 나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요. 외출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사랑하는 여자가 보기 좋고 맛 좋은 음식을 해 놓고, 프릴이 달린 귀여운 앞치마를 입고 기다리고 있는 장면.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꿀 만한 것 아니겠어요? 너무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요? 희영 씨는 사랑을 해봤나요? 아…. 사랑을 해보면 이 마음을 알 수 있을 거예요. 됐어요. 구시대적이든 뭐든 좋아요. 어쨌든 나는 그의 로망을 실현해주고 싶었어요.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연습했어요. 


 집에서 한창 요리를 하고 있을 때 엄마가 옆에 와서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어요. 너 사랑에 빠졌구나? 다음에 기회 되면 소개해 줘. 우리 딸 이제 어른이 다 됐네. 그렇게 말하며 엄마는 인자한 미소를 띠었어요. 그리고 이것저것 알려주셨죠.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그렇게 노력해서 겨우 요리다운 요리를 할 수 있게 된 어느 날, 그의 자취방에 가서 음식을 만들고 두근대며 그를 기다렸어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그가 화색을 띠며 음식을 한 입 맛보았어요. 나는 그의 반응을 숨을 죽이고 기다렸어요. 내 노력을 알아줄까. 얼마나 따뜻한 말로 나를 칭찬해 줄까. 다음에는 또 어떤 음식을 만들어주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오물오물 몇 번 음식을 씹던 그의 표정이 일순 구겨졌어요. 그리고는 가차 없이 접시에 음식을 뱉었어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말했어요. 


지금 나에게 이딴 걸 먹으라고 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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