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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경계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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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사리아 Sep 14. 2023

9.

분홍색 니트

내성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맞으면 아프고 어떨 땐 서러워요. 당연한 감각이겠죠. 집에서 혼자 있을 땐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하루를 겨우 버티며 살아가고 있을 때…. 그렇군요. 말을 하다 보니 알게 된 건데 나는 버티고 있었네요. 하루를. 아무튼 그렇게 지내고 있을 때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듯이, 내 현실을 깨닫게 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말을 그와 보내고 있었어요. 그가 저녁 약속이 있어 낮에 그의 방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죠. 밥을 차려 먹고 나른한 오후에 그는 침대에 누워, 나는 바닥에 앉아 서로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낄낄거리더니 책의 한 구절을 읽어줬어요. 판타지 장르 소설이었던 거 같은데. 남성향으로 간혹 외설적인 글들이 있더라고요. 남자가 여자를 좌지우지하며 농담조로 농락하는 내용을 읽으며 이렇게 기발한 문장을 어떻게 쓴 걸까? 따위의 이야기를 했어요. 평소라면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그저 호응을 했을 텐데 그날따라, 아니 그 이야기에 동의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웃음기 없이 하나도 재미없다고 말했더니 또다시 폭행이 시작됐어요. 한 동안 말 잘 듣나 싶더니 매가 모자랐구나 생각했는지 어느 때와 다르게 심하게 맞았어요. 기절할 정도로. 정말로 한 동안 쓰러졌던 것 같아요. 눈을 떠보니 어느새 해가 져 있더라고요. 불이 꺼진 어두컴컴한 방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내 옆에 없었죠. 코피가 터져 얼굴이 범벅이 된 채로 쓰러진 날 두고 그는 저녁 약속을 가버린 거예요. 정말 너무하죠? 맞아요. 정말 너무해요. 처음으로 강하게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와 헤어져야겠다고 결심했죠. 마침내. 정말로 마침내 스스로 인정했어요.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끝내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그 말을 하기 전에 그가 나를 죽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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