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경계 11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사리아 Sep 15. 2023

11.

분홍색 니트


희영은 소담이 사라진 자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또 하나의 영혼이 자신 앞에서 하얀빛을 내며 소멸했다. 간혹 소담같이 성불이라고 이야기하며 떠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희영은 그것을 소멸이라고 생각했다. 성불이라는 말이 싫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같은, 새로운 인생으로 재 탄생되는 기회가 주어질 여지가 있는 어감이 불편했다. 그 말 자체가 사람이 죽는 것을 비유하는 점도 있고. 원 뜻으로 치자면 궁극의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일이니까. 인간이 죽음으로 인해 득도를 한다는 게 어불성설 아닐까.

 

희영은 절대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죽으면 완전히 소멸하여 흔적조차 남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다고는 해도 개인차는 있으니 그들이 말하고 싶고 믿고 싶은 데로 두었다. 구태여 성불이 아니라 소멸입니다, 하고 사라져 가는 영혼에게 소리칠 생각은 없었다. 허공에 대고 그런 말을 해 봤자 닿을 곳도 없고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게 뻔했으니까. 힘들게 살아온 영혼의 마지막이 따뜻했다면 그것으로 됐다. 사라지는 현상을 무엇이라 부르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오늘은 깜빡하고 이어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실수했다 싶었다. 보통 희영은 영혼이 말을 걸 상황을 대비하여 그것을 꼭 들고 다녔다. 대부분은 정면을 주시하고 혼자 사색에 잠긴 듯한 자세로 이야기를 듣지만, 대답이 필요한 경우가 있으니까. 그럴 때면 영혼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희영이 혼자 중얼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다지 타인을 신경 쓰지 않지만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있으면 혼자 앉아 뭐라고 떠들어도 사람들은 의례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고 생각했다. 희영은 살기 좋은 환경의 타이밍에 영혼이 보여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어폰으로 전화가 불가능한 시대였다면? 윽, 생각하기도 싫다.

 하지만 오늘 같은 경우가 간혹 있다. 이럴 때 가끔 마음 좋은 어머님들이 측은한 눈빛으로 아가씨 괜찮아요? 하고 말을 걸기도 하는데, 오늘은 그런 일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담의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공원에 있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희영을 힐끗거렸다. 허공에 대고 손짓을 하는 사람이 멀쩡해 보이진 않았겠지. 괜한 짓을 했다. 희영은 내적으로 이불킥을 하면서도 애써 태연하게 벤치에서 일어났다. 경보하듯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빠져나왔다. 언제나 민망함은 내 몫이라니까. 희영이 살짝 원망 섞인 말을 마음으로 내뱉었다. 이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기지개를 켰다. 오늘 산책은 이걸로 됐다. 돌아가자. 희영은 은행을 밟지 않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이전 10화 10.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