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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경계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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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사리아 Sep 14. 2023

10.

분홍색 니트

희영 씨, 당신은 알고 있죠?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거. 내가 영혼이라는 거. 그러니까 이렇게 담담하게 나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요? 후후, 뭔가 내 얘기를 이렇게 듣고 싶어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기분 좋네요. 맞아요. 저 굉장히 낙천적인 성격이에요.


 그후로 기회를 엿봤어요. 어떻게 해야 그에게서 안전하게 떠날 수 있을까. 헤어지고도 날 괴롭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찌해야 할까. 그날, 그의 기분이 굉장히 좋았어요. 이런 말은 좀 부끄러워서 망설이게 되는데…. 그는 고고하게 온화함을 가장하고 살았지만 실상은 매우 본능적인 사람이었어요. 그… 관계 맺는 것을 좋아했는데, 가학적인 플레이에 로망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그렇게 한 적은 없어요. 손찌검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도 잠자리에서 만큼은 다정했어요. 사실 비교대상이 없어 진짜 다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첫 남자친구였어요. 그 사람과 모든 것을 처음으로 함께했죠. 그는 이 부분만큼은 저를 존중해줬어요. 간혹 조르기는 했지만 제가 전에 없는 난색을 표하니 더는 요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우리 사이에 사랑은 있다고 믿었나 봐요.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면 잘 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로망이 실현되면 나에게 더는 집착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죠? 멍청하게도. 그런 단순한 게 아니었는데. 요란한 건 아니지만 수갑을 준비했더라고요. 싱글벙글한 얼굴로 나에게 수갑을 채우고 관계를 맺었죠. 와중에 그가 갑자기 제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악력이 약했기 때문에 그냥 플레이 중 하나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점점 손에 힘이 들어갔어요. 몸을 버둥거리는 것도 무시하고 그는 웃으며 나의 목을 졸랐어요. 찰나에 그의 눈에서 살기를 봤어요. 감히 네가 나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냐는 말을 하는 듯했죠. 그렇게 나는 그의 아래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어요.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었으니까. 그는 아마 그날, 내가 헤어짐을 이야기할 걸 알았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내가 다짐한 순간부터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네요. 뭐, 그후로 그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당연히 모르죠. 아마 나를 유기해서 평생을 잘 숨기고 살 수 있지 않다면, 지금쯤 감옥에서 본능을 드러내며 살고 있지 않을까요? 영혼이 되어 부모님을 찾아간 적이 있냐고요? 아니요. 단 한 번도 없어요. 이승을 떠 돈 지 꽤 된 것 같은데… 한 번도 그들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알아볼 수도 없고 말이죠. 알잖아요?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정말 나쁜 딸이에요. 엄마 아빠를 실망시켰어요.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딸이 남자와 관계를 맺다가 목 졸려 죽임을 당하다니. 그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까요. 엄마는 나를 예쁘게 키웠는데. 아빠는 나를 공주처럼 키웠는데. 내가 모든 걸 망쳤어요.


나는, 희영 씨 당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냥 신세 한탄이 하고 싶었던 걸까요.

네? 다시 한 번 말해줄래요?

…고마워요. 그들이 날 원망하지 않을 거라고. 착한 딸로 기억될 거라고 말해줘서.

결국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었나 봐요. 앗! 이것 봐요. 희영 씨. 내 몸이 점점 옅어지고 있어요! 이게 바로 풍문으로 듣던 한을 푼, 성불인 걸까요? 뭔가 엄청 따뜻하고 포근한 게 기분이 너무 좋네요. 아! 나요,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고마워요. 희영 씨. 당신은 우리에게 있어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예요. 그럼, 잘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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