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영 씨, 당신은 알고 있죠?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거. 내가 영혼이라는 거. 그러니까 이렇게 담담하게 나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요? 후후, 뭔가 내 얘기를 이렇게 듣고 싶어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기분 좋네요. 맞아요. 저 굉장히 낙천적인 성격이에요.
그후로 기회를 엿봤어요. 어떻게 해야 그에게서 안전하게 떠날 수 있을까. 헤어지고도 날 괴롭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찌해야 할까. 그날, 그의 기분이 굉장히 좋았어요. 이런 말은 좀 부끄러워서 망설이게 되는데…. 그는 고고하게 온화함을 가장하고 살았지만 실상은 매우 본능적인 사람이었어요. 그… 관계 맺는 것을 좋아했는데, 가학적인 플레이에 로망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그렇게 한 적은 없어요. 손찌검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도 잠자리에서 만큼은 다정했어요. 사실 비교대상이 없어 진짜 다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첫 남자친구였어요. 그 사람과 모든 것을 처음으로 함께했죠. 그는 이 부분만큼은 저를 존중해줬어요. 간혹 조르기는 했지만 제가 전에 없는 난색을 표하니 더는 요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우리 사이에 사랑은 있다고 믿었나 봐요.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면 잘 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로망이 실현되면 나에게 더는 집착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죠? 멍청하게도. 그런 단순한 게 아니었는데. 요란한 건 아니지만 수갑을 준비했더라고요. 싱글벙글한 얼굴로 나에게 수갑을 채우고 관계를 맺었죠. 와중에 그가 갑자기 제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악력이 약했기 때문에 그냥 플레이 중 하나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점점 손에 힘이 들어갔어요. 몸을 버둥거리는 것도 무시하고 그는 웃으며 나의 목을 졸랐어요. 찰나에 그의 눈에서 살기를 봤어요. 감히 네가 나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냐는 말을 하는 듯했죠. 그렇게 나는 그의 아래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어요.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었으니까. 그는 아마 그날, 내가 헤어짐을 이야기할 걸 알았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내가 다짐한 순간부터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네요. 뭐, 그후로 그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당연히 모르죠. 아마 나를 유기해서 평생을 잘 숨기고 살 수 있지 않다면, 지금쯤 감옥에서 본능을 드러내며 살고 있지 않을까요? 영혼이 되어 부모님을 찾아간 적이 있냐고요? 아니요. 단 한 번도 없어요. 이승을 떠 돈 지 꽤 된 것 같은데… 한 번도 그들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알아볼 수도 없고 말이죠. 알잖아요?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정말 나쁜 딸이에요. 엄마 아빠를 실망시켰어요.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딸이 남자와 관계를 맺다가 목 졸려 죽임을 당하다니. 그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까요. 엄마는 나를 예쁘게 키웠는데. 아빠는 나를 공주처럼 키웠는데. 내가 모든 걸 망쳤어요.
나는, 희영 씨 당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냥 신세 한탄이 하고 싶었던 걸까요.
네? 다시 한 번 말해줄래요?
…고마워요. 그들이 날 원망하지 않을 거라고. 착한 딸로 기억될 거라고 말해줘서.
결국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었나 봐요. 앗! 이것 봐요. 희영 씨. 내 몸이 점점 옅어지고 있어요! 이게 바로 풍문으로 듣던 한을 푼, 성불인 걸까요? 뭔가 엄청 따뜻하고 포근한 게 기분이 너무 좋네요. 아! 나요,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고마워요. 희영 씨. 당신은 우리에게 있어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예요. 그럼, 잘 지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