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년이었다며~^^
끔찍한 일이 일어난 시기. 그때의 날씨며, 냄새며, 촉감까지, 그리고 그 장소와 그 안에 우리가 있었던 위치, 우리가 나눴던 한마디 한마디, 그 살벌했던 분위기며, 서로를 향해 내뿜는 에너지와, 그 눈빛... 너무 생생한 기억들에 압도당하게 된다.
결혼 수업에서 배웠던 내용 중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 그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 매년 돌아오는 그날 D-Day anniversary 를 어떻게 보내야 할 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업에서는 진실한 대화를 해보고 서로에 대한 사랑과 확신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교훈을 준다.
내가 배신감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그만큼 그 사람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뭐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 우리 남편이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 아이는 착한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우리 강아지는 안 물어요. 사실 이건 그럴 리가 없다는 나의 믿음일 뿐이지 상대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만약에 내가 그 사람을 믿고 싶지 않았더라면 역시 여자의 촉은 사이언스야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겠지.
내가 상처받은 이유는 남이 나에게 상처 줘서가 아니다. 남편 때문도 아니며 남편의 여사친 때문도 아니다. 남편에게 여사친에게 사과를 듣고 위로를 받는다고 내 기분이 나아질까? 절대 아니다. 내가 상처받은 이유는 내가 나의 가치와 존엄성을 스스로 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그 일은 벌어졌고 과거를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도 없는데. 내 자존감이 바닥을 친 상태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내가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가치와 존엄성을 스스로 깨닫고 그에 맞게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내가 선생님께 배운 인생은 이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직접 해야 한다는 것.
내가 초대하지도 않은 선생님이 우리 부부의 혼인 서약식에 나타나셨다 해도
1. 그때 선생님께 정중하게 떠나길 부탁하거나,
2. 그때 참고, 주례 선생님과 나, 남편, 선생님 이렇게 셋이서 혼인 서약식을 이미 했으면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당시에는 한마디도 못하고 이제 와서 왜 왔는지 원망해봤지 아무 소용이 없다. 게다가 과거의 나는 내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이 한국 혼인신고서에 증인으로 선생님의 사인까지 받아와도 한마디도 못했다.
내가 남편과 선생님의 친구관계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면
1. 그때그때 불편한 점을 당사자들과 대화로 풀거나,
2. 남편과의 관계를 재고해봤어야 한다.
남편에게 선생님과 연락하지 말라고 행동을 통제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고, 남편과 선생님의 연락이나 만남을 사사건건 캐물으며 왜 그랬냐 무슨 의도로 그랬냐 따져 물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결혼 전 봤던 영화 <건축학개론> 서연과 승민도 친구사이겠지? ^^ 하하.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은채였다면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당당하게 허리 딱 펴고 앉아 내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갈팡질팡하는 남친에게 그리고 그의 여사친에게 교통정리 확실히 해줄 수 있었을까? 우리가 결혼할 사이임을 대내외적으로 공고히 하며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당연한 나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도 못한 채 숨어만 있었는데... 불청객 앞에서 남편의 첫사랑이 "쌍년이었다며~^^" 를 시전 할 수 있었을까?
어렸을 때 본 영화와 지금 보이는 영화는 차이가 정말 크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환경이 사람을 만들고 입장이 사람을 만드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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