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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작은 행동이 아이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나는 부끄러운 아빠였는지도 모른다.

by 여지행

말 내내 회사 출장으로 바쁘게 보냈다. 일요일 늦게야 복귀한 후, 오랜만에 찾아온 평일 휴무로 월요일 아침을 보낸다. 초등학생인 아이는 방학이라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아내는 출근했고, 집에는 나와 아이만 남았다. 아이와 단둘이 맞이하는 월요일 아침은 새롭게 느껴졌다.

아이도 이제 어느덧 스스로 책을 읽고 숙제를 한다. 아침 9시, 아이는 침대에 앉아서 책을 읽겠다며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단잠을 깨기는 했지만, 사실 내심 대견하고 기분이 좋았다. "아빠는 20분만 더 자려고." 나는 모처럼의 단잠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30분쯤 지나니 아이가 책을 다 보고 거실로 가서 숙제를 시작했다.

스스로 자기 일을 하는 아이를 보며, 내가 이불속에 있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내가 주말 내내 바쁘고 힘들었어도 그 모든 상황을 아이가 이해하기는 어렵다.

단지 지금의 내 모습이 오랜만에 집에 있는 아빠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사실 아무리 바쁜 주말을 보냈다 해도 결국 월요일 아침 이불속에서 더 누워 있고 싶다는 건 나만의 핑계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거실로 가서 책을 읽고,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집에서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는 경우도 많지만, 되도록이면 노트북을 쓰려고 한다.

'아빠가 놀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아빠가 지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리는 방법은 많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말이 아닌 내 모습과 행동 자체가 아이에게는 본보기가 될 테니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무심코 한 말들, 평소의 행동들이 지금의 아이에게 영향을 미쳤을 수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내가 아이에게 보여주는 모습에 더 신경 써야 한다는 걸 잊지 않는다.


최근 세스 고딘의 [린치핀]에서 나오는 말이다.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사람들은 사회와 시스템이 주는 한계를 넘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한계를 두지 않았고, 그 태도가 그들을 평범한 사람들과 차별화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 길을 밝혀준 위대한 스승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부모나 친구가 그들을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곁에서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한계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인가?"

솔직히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에게 좋은 스승이었나?" 질문해 본다.


난 사실 부모로서도 여전히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아이도 이겨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아빠로서 참 부끄러웠다.

물론 말은 늘 격려하고, 위로하고, 응원했지만, 진짜 마음속으로 정말 이 아이가 이 한계들을 넘어갈 수 있다고 100% 믿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나의 한계를 늘 제한하며 살아왔고, 어쩌면 그 기준을 아이에게도 적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깨달음에 나는 아빠로서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앞으로 다른 태도를 장착하기로 결심한다.

'나는 나의 한계를 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성향이나 성격이 쉽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조금씩이라도 바꿔나갈 것이다. '

무엇보다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한계점도 미리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과거의 나처럼 자기 합리화에 빠지지 않도록,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온 마음으로 도울 것이다.

"딸아~ 말로만 격려하지 않을게. 온 마음으로 정말 네가 스스로에게 한계를 두지 않도록,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그리고 과거의 아빠처럼 자기 합리화에 빠지지 않도록 도울게. 아빠도 우리 딸에게 위대한 스승이 되어볼게."


그렇게, 나는 오늘도 성장한다.

내 아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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