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인 오늘은 나와 아들이 함께 뛰는 날이다.
평일 저녁에는 내가 댄스학원에 가기 때문에
아들은 주로 아빠와 걷기 운동을 한다.
허리 통증이 있는 남편은 공원을 끝까지 도는 대신,
어느 지점쯤에서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 습관이 아이에게 남을까 걱정돼,
조금 힘들더라도 끝까지 한 바퀴를 완주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남편과 나는 아이를 대하는 태도부터 달랐다.
남편이 아이를 감싸는 포근한 봄바람 같다면,
나는 가끔 호랑이 아빠 같았다.
남편은 피곤해하는 아이를 보면 쉽게 돌아서는 쪽이지만,
나는 웬만하면 목표 지점까지 가자고 설득하는 편이다.
달리는 자세를 교정해주거나,
길 위의 풍경을 빌려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나는 자존감이 꽤 높은 편이지만,
예전에는 목표지향적이고 강직한 성격 때문에
스스로 힘들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남편과 결혼하면서 나 스스로를 더 잘 인정하고 긍정하게 되었고
지금의 자존감이 비로소 자리 잡았다.
그래서 나와 정반대 성향을 가진 남편이 늘 고맙다.
이제 학교 선생님도, 동네 어른도,
아이가 잘못했을 때 따끔하게 야단쳐 줄 이가 거의 없다.
나는 그것이 오히려 아이에게 큰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 가정 안에 서로 다른 결을 가진 부모가 있다는 건
아이에게 꽤 균형 잡힌 환경일지도 모른다.
남들은 금세 포기해버린다던 교정 인솔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꿋꿋이 착용할 수 있었던 건,
남편의 인자함 덕분이었다.
반대로 평발 때문에 뒤뚱거리던 걸음걸이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건,
내 집요한 관찰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같이 달리기를 시작한 첫날,
나는 아들의 걸음걸이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아마도 심한 평발로 인해 인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균형을 찾으려다 보니, 몸이 좌우로 흔들리며
뒤뚱거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는
‘지금이라도 교정해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잘못된 걸음걸이는 인상뿐 아니라
척추나 골반에도 무리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걸음걸이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평소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운동 나갈 때만 몇 번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그랬더니 금세 달라졌다.
등을 곧게 세우고, 가슴을 펴고,
시선을 정면으로 두고, 팔을 자연스럽게 흔드는 것.
15년 넘게 이어온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렵겠지만,
아들은 의식적으로 잘못된 걸음을 고치려 애썼다.
나는 그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트랙의 절반쯤 다다랐을 때 아들이 말했다.
“엄마… 발바닥이 뜨거워.
잠깐 신발을 벗고 식히고 가자.”
평발 교정을 위해 넣은 인솔이
열을 배출하지 못해 땀이 차고 답답해진 탓이었다.
순간, 그 고생이 다 내 탓 같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첫 아이를 품었을 때가 떠올랐다.
불안과 설렘 사이를 오가던 그 시기,
한 고질 민원인이 매일 찾아와 나를 붙잡았다.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처리해달라고
사흘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한 시간씩 언성을 높였다.
그 고된 시간이 누적되던 셋째 날,
퇴근길에 갑작스러운 이상이 찾아왔다.
예정일보다 일주일이나 일찍
제왕절개 수술대에 오르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아기가 덜 괴로웠을 텐데…
내가 너무 생각이 없었어.”
그 기억은 아이가 병치레를 하거나
약시, 평발 같은 진단을 받을 때마다 불쑥 되살아났다.
혹시 그때의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건 아닐까.
빨리 휴직을 해버렸어야 했는데,
좀 더 과감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림자처럼 오래오래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지나간 일을 붙잡아봤자
아이에게 전해질 건 우울뿐이었다.
뱃속에서 한 배꼽으로 연결돼 있던 아이라면, 내 기운도 느낄 테니까.
“하티야, 인솔이 답답하지?
다음에 대구 가면 통풍 잘 되는 걸로 하나 사줄게.”
내 말에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되레 물었다.
“엄마, 엄마 발은 괜찮아?”
자신의 고통을 기준으로 엄마를 헤아리는 그 마음이 기특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 신발도 원래는 딱딱했어.
그래도 꾸준히 뛰다 보니 이젠 익숙해졌지.
불편한 환경에서 자신을 갈고닦은 사람은
언젠가 좋은 환경을 만나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거야.
너도 그래.
지금은 조금 힘들겠지만
견뎌내다 보면 훨씬 좋은 결과를 만나게 될 거야.”
아들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가 조금 더 반듯해지고, 고개가 정면을 향했다.
이제 아들은 달리기를 하면서
조금씩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조금만 오래 뛰어도 가슴이 아프다며 힘들어했지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달리는 자세가 원인일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알게 되었다.
또 뛰는 동안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법,
어느 지점까지 전력으로 달리고 어디서부터 속도를 늦출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고 때로는 몸 그 자체로부터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
내가 다 알 수는 없지.
하지만 그 불편함을 스스로 감내하며
성장하는 우리 아들은 결국 더 큰 그릇의 사람이 될 것이다.
불평 한마디, 불만 한마디 없이 묵묵히 제 길을 내딛는 아이니까.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아이의 성장은 결국 작은 불편을 견디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아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조언해 줄 수는 있어도,
결국 부모의 역할이란, 그저 옆에서 조용히 호흡을 맞춰주는 것뿐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