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진료실에서 못한 말(16)
우리 집 화장실은 늘 깨끗했다. 혼자 살기 전까지는 물곰팡이를 본적이 없었다. 수건은 당연히 늘 채워져있는 줄 알았다. 주말이면 락스 청소를 하느라 한두시간은 화장실을 못 썼다. 세면대가 늘 반짝였다. 남자 셋이 사는 집이었지만 변기에 소변 튄 자국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집의 다른 방도 늘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었다. 아침에 잠을 덜 깬 채로 이불을 엉망으로 해두고 가도 집에 돌아오면 침대가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책상도 지우개똥 하나 없이 깔끔했다. 책도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집을 어지럽혀도 어머니께서 늘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셨다. 어떤 물건을 찾고 싶으면 고민하지 않고 늘 있는 곳에서 찾으면 됐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었다. 집에 있으면 마음이 평온했고 나는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자취를 시작하며 어머니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집이 그렇게 깔끔하게 유지되지 않았다. 바닥에 머리카락이 굴러다녔다. 이불은 구겨져서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었다. 책은 책장에 꽂혀 있는 일이 드물었다. 전기선들도 정리되지 않았다. 냉장고 안은 오래된 재료와 배달 음식의 남은 반찬으로 가득찼다. 식탁은 음식을 먹는 곳이 아니라 짐을 올려놓은 곳이 되었다. 잡동사니들이 분류되지 않은 채 여기저기에 드래곤볼처럼 산개 돼 있었다. 무언가를 찾으려면 한참을 뒤져야했다. 공부를 하려면 정리되지 않은 집이 눈에 들어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집이 어지러워 공부를 못했다는 변명은 구차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뇌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인간의 뇌는 여러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할 수 없게 되어있다. 멀티 태스킹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나마 4-5가지의 일을 돌아가면서 생각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주의 전환에도 상당한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하다. 중요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생각이 끼어든다. 게다가 우리 뇌는 중요한 업무와 덜 중요한 업무의 구분을 어려워한다. 시험 전날 공부 도중 더러운 책상이 눈에 들어와 갑자기 청소를 해 본 경험이 다들 한번씩은 있다. 뇌에게는 책상 청소와 시험의 중요도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류와 정리 정도이 중요한 것이다. 어지러우면 뇌는 쉴 수가 없다.
요즘은 모두 핸드폰이라는 거대한 혼란 덩어리를 들고 다닌다. 핸드폰이 여러가지를 정리하게 도와주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불규칙한 자극을 전달한다. 쿠팡에서 특가가 떴다고 한다. 수많은 카톡방에서 알람이 온다. SNS에는 새 게시물이 올라왔다고 팝업이 뜬다. 넷플릭스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새 컨텐츠가 업데이트 됐다고 한다. 핸드폰 하나로도 우리 뇌는 과부하 상태이다. 그 상태에서 어질러진 집을 보면 뇌는 파업을 한다. 그저 침대에 눕고 싶을 뿐이다.
아마 어머니께서는 이러한 뇌과학을 알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그저 가족들을 생각하며 깔끔해진 집을 보며 흐뭇해 하셨지 싶다. 그 덕에 나는 속시끄럽지 않게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어머니처럼은 못하지만 요즘은 나도 집을 깔끔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물건을 제자리에 두려고 노력한다. 이불도 갠다. 수납장을 사서 정리를 한다. 그러고 나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잠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