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진료실에서 못한 말 (18)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쉬는데도 기분이 안 좋아요’. 이제 갓 수능이 끝난 19세 남자 A 씨의 주 증상이었다. 수능은 자기가 원하는 정도의 결과가 나왔다. 부모님과의 관계도 괜찮고 별다른 스트레스도 없다. 그런데도 ‘별다른 이유 없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시험공부 할 때보다도 기분이 더 안 좋다고 했다.
자기 전 갖가지 생각이 들며 잠을 설쳐본 적이 있는가? 불행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들면서 기분이 안 좋아진다. 마음이 불안해지며 ‘오늘 내가 잘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날 잠은 다 잤다. 다음 날까지 불안은 지속되고 기분이 안 좋다. 심지어 이런 ‘잡생각’은 내가 집중할 때도 끊임없이 침습한다. 수업에 집중하고 있을 때, 연인과 대화하고 있을 때도 우리는 ‘백일몽’에 빠져든다. 가끔은 나에게 문제가 생겼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비슷한 문제로 본인이 ADHD(주의력 결핍/과잉행동 장애)가 아닌지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은 휴식 시 인간의 뇌가 아무것도 안 하는 줄 알았다. 마치 컴퓨터 전원이 꺼진 것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연구를 하는 도중 인간의 뇌가 휴식 시에도 활성화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을 기본 모드 신경망(default mode network, DMN)이라고 한다. 이 DMN은 자기의식, 기억, 정보 처리 등의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멍때리는 순간에도 뇌가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 ‘멍때리기’는 가만히 놔두면 부정적인 기분이 든다는 특징이 있다. 극단적으로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보다 ‘멍때리기’만 할 때 기분이 더 안 좋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때때로 기분이 안 좋고, 우울감도 느끼는 것이다. 방황하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이다.
다행히 모든 ‘멍때리기’가 나쁘지는 아니다. ‘멍때리기’를 하되 정돈된 ‘멍때리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들어서 ‘불멍’, ‘물멍’, ‘숲멍’ 등이 유행하는데, 이것은 모두 좋은 ‘멍때리기’이다. 한 곳에 집중하되 그것을 너무 많이 의식하지는 않은 상태, 그것이 정돈된 ‘멍때리기’이다. 이런 ‘멍때리기’는 불안을 줄여주고, 행복감을 준다. ‘불멍’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방황하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이다
긍정적인 ‘멍때리기’의 극한이 바로 명상이다. 고대부터 명상은 잡생각을 줄이고 행복감을 준다고 알려져 있었다. 최근에는 그 효능에 대해 뇌과학적으로도 입증이 많이 되었다. 명상이라고 하면 흔히 가부좌를 틀고 정신적으로 복잡한 과정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간단하게 긴 호흡을 하는 것만으로도 명상의 효과를 약간 낼 수 있다. 3~4초의 들숨과 6~8초의 날숨을 복식호흡으로 10분만 해도 불안 감소, 집중력 향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복잡한 것이 싫다면 단순히 창문 밖에 먼 구름을 오랜 시간 응시하거나, 집에 양초를 켜놓고 불빛을 응시하는 것으로도 좋은 ‘멍때리기’의 효과를 낼 수 있다. 하루 종일 공부, 작업, 유튜브 영상, 인스타그램 등으로 쉴 새 없이 일한 뇌에 정리할 시간을 잠깐 내어주는 것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