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oha Sep 23. 2022

꽃집 '트리 앤 바이올렛' 입니다

[소설] 나비가 손님인 꽃집 3

  “트리 앤 바이올렛_Tree & Violet 이라니... 꽃집 이름이 그게 뭐야? 그냥 '해례 꽃집'이나 '해례 농원'이 낫지 않겠어?”

  “내가 좋아하는 거 두 가지를 합친 거야. 나무 그리고 보라색.”

  “그러니까 보라색 나무인 건 알겠는데... 네가 좋아하는 거랑 꽃집 이름이 무슨 상관이냔 말이야? 가게 이름 짓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작명소는 못 찾아갈망정 너 지금 무슨 장난치니?”

  고등학교 동창인 영은은 개업선물로 들고 왔다는 케이크를 저 혼자 벌써 절반쯤 먹어 치우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 둔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집에는 말하지 못한 탓에 낮에는 밖에서 시간을 때운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무척이나 배가 고파 보였다.

  “언젠가 봄에 벚나무 고목을 본 적이 있는데 말이야, 그 나무 중간색 커다란 구멍이 있더라고. 이끼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 구멍에서 조그맣게 제비꽃이 자라고 있지 않겠어? 여리디 여린 보라색 꽃이 얼마나 예쁘던지... 그때 생각이 났어. 나무와 제비꽃, 트리 앤 바이올렛. 그냥 이 공간은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채우고 싶어”

  “내 생각에는 그 이름이 엉뚱할 뿐만 아니라 좀 어렵단 말이지... 가게 이름은 무조건 귀에 쏙 들어오는 게 좋은 거야. 트리 앤 바이올렛은 음... 그러니까 ‘트림이나 방구’같이 들려. 에이, 난 모르겠다. 네가 좋으면 그만이지 뭐”

  개업식이랄 것도 없이 해례가 정호 아저씨를 만나고 온 다음 날부터 꽃집은 문을 열었다. 구석구석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유리에 붙은 시트지를 떼어내니 아침나절에는 제법 해가 깊게 들어왔다. 바닥을 제외하고 흰 페인트를 모두 발랐다. 요령이 없는 해례가 직접 작업한 터라 덕지덕지 바른 감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멋이 있었다. 간간히 골목을 지나는 어르신들이 가게 안에 고개를 들이밀면 해례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놓고 수줍게 웃으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뭐한다고 젊은 아가씨가 사다리 위에 올라앉아 있는 거야? 여기서 뭐 하려고?”

  “아, 저... 그냥... 청소하는 거예요.”

  처음 그런 질문을 들었을 때 해례는 꽃집을 열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수다가 그리웠던 어르신들은 해례의 대답을 듣고 나서도 좀처럼 자리를 뜰 줄 몰랐다. 게다가 주택 앞마당에 화분 너댓개는 당연히 갖고 있던 어르신들에게 ‘꽃’은 너무나 반가운 주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해례는 어르신들을 뵐 때마다 말수를 줄이고 가능한 먼 곳을 바라보며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가게 안을 서성거렸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뭔가 모를 죄책감이 드는 건 사실이야. 엄마는 언제나 동네 어르신들을 뵈면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인사도 잘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하시지만 말이야... 사실은 어르신들의 일방적인 수다를 듣다 보면 결국은 자식들 자랑에 손자들 자랑으로 끝나게 마련이거든. 내 자식들은 이렇게나 잘났는데... 너는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하는 말을 공손하게 듣고 있기가 힘들어. 게다가 할 일도 많은데, '뭐 하는 거냐? 그건 왜 하는 거냐?' 하시면서 캐묻는 것도 사실 번거롭고 말이야... 막상 설명해 드려도 관심도 없으신 걸 뭐. 그래서 어디까지 말씀드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러면서도 버릇없이 구는 것 같아서 죄송하고...”

  “너도 모르게 이 동네 화제의 중심이 되어 버렸구나. 그럴 때는 그냥 ‘제가 지금 바쁜데 다음에 놀러 오세요.’ 하면 되지. 그럼 버릇없는 건가?... 그런 거라면 젊은 사람들한테 예절은 너무 어려운 거네.”

  꽃이 워낙 예쁘다 보니 가게 안은 하얗게 칠해 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꽃을 넣을 작은 중고 냉장고를 한켵에 놓고, 작업대는 원래부터 있던 정호 아저씨의 책상을 쓰기로 했다. 튼튼하고 큰 사무용 책상이라 괜찮아 보였다. 손님이 오면 앉을 수 있는 작은 탁자와 의자를 마련해놓고, 나머지 공간에는 식물을 들여놓았다. 공간이 넓지 않아서 몇 개만 놓아도 분위기가 제법 꽃집 같았다. 전화기는 놓았지만 팩스는 당분간 목공방에서 빌려 쓰기로 했다. 그런 건 주문이 많아지면 들여놓아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청소를 하고, 살림살이들을 하나씩 들여놓을 때마다 해례는 가슴이 뛰었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이제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 겁이 나기도 했다. 아무도 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지, 전화기가 내내 울리지 않으면 어쩌지...

  개업식을 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동네 어르신들께 떡이라도 돌려야 한다고 했지만, 해례는 그것 역시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최대한 조용히 시작하고 싶었다. 해례는 조용한 사람이었고, 꽃도 이파리도 말이 없었으며 꽃집도 그러기를 바랐다.

  “가게를 조용히 시작하는 게 말이 되는 거야? 왜 개업식 하면 가게 앞에서 늘씬한 언니들이 와서 춤도 추고 하잖아. 그게 다 최대한 시끄럽게 시작하려고 그러는 건데... 아니야? 안되면 너라도 나가서 춰야지.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한테 죄다 소문도 내고...  설마 그래서 간판도 안다는 거야? 너 뭐, 지금 첩보작전 중이니?”

  “이렇게, 이렇게 추면 되는 거야?"

  해례는 은영이 가게 앞에서 춤이라도 추라는 말에 팔, 다리를 최대한 휘저으며 우스꽝스러움 몸짓을 해 보였다. 

  "너도 같이 해. 둘이서 하면 그나마 좀 볼만하지 않겠어?"

  “아이고, 내가 진짜 눈뜨고 못 보겠네. 기껏 왔던 사람도 다 도망가겠다. 그만해”

  “원래 식당도 간판 없는 집이 숨은 맛집이라잖아. 그리고 개업식이라는 게 제대로 차린 가게에나 어울리는 거지. 지금은 지나치게 소박한 감이 있으니깐 조용히 시작해 볼래. 알릴 사람도 없어. 사실은 좀 부끄럽기도 하고...”

  은영은 한 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제 케이크도 은영의 뱃속으로 거의 사라지고 난 뒤였다. 

  “뭐, 네가 무슨 죄라도 졌니? 아니지, 돈 없는 것도 죄라면 죄다. 울 엄마한테 나도 카페 하나 차려 달랬다가 욕만 뒤집어썼어. 다니던 직장이나 얌전히 다니라나. 그만 둔지가 언젠데... 뭘 얌전히 다녀. 그래, 누구는 뭘 한다더라, 누구는 어디 시집을 갔다더라. 잘 나가는 애들도 천진데 너나 나나 여태껏 이모양이니... 그러지 말고 나도 내일부터 여기 출근해야겠다. 너 바쁠 때 내가 좀 도와주면 좋잖아”

  내일부터 갈 곳이 생겨서 신이 났는지 은영은 테이블 위를 치우며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게라는 곳은 혼자만의 공간이 되기에는 어려운 것 같았다. 

  “이 거 향기 좋다. 이 꽃 이름이 뭐니? 나도 이제 이름 정도는 몇 개는 알고 있어야지” 


  “그러니깐 ‘부바르디아’를 찾으시는 거죠? 그런 꽃은 미리 예약을 해 주시면 준비해드릴 수 있어요”

  “지금 당장 필요한데... 언제 예약을 해요?”

  작업대 앞에 서 있던 남자 손님의 어깨 너머로 은영이 입을 삐쭉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오늘 장미도 예쁜데, 다른 꽃은 싫으세요?”

  “꽃은 여기 있는 게 다예요?”

  냉장고 안을 빠르게 훑어보던 그의 눈이 해례와 마주치자 날카롭게 빛났다. 

  “아... 네... ‘부바르디아’를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는 건 아니고... 부바르디아 꽃말이 ‘나는 당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라고 해서 여자 친구한테 주려고요. 아니면 비슷한 꽃말을 가진 다른 꽃은 없어요?”

  “노예... 아니... 포로가 되었다는 꽃말을 가진 꽃은 없는데... 아니면 ‘스토크’는 어떠세요?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거든요. 향도 아주 좋아요.”

  고민에 빠져 있던 손님이 마지못해 스토크 한송이를 손에 들고나가자 해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바르다아는 뭐고 노예... 아니 포로는 또 뭐야? 꽃이 예쁘면 되는 거지. 난 또 손님이 화난 줄 알고 잔뜩 쫄았네”

  해례가 이른 아침 꽃시장에서 갖고 온 꽃들이 싱싱한 얼굴을 내밀고 냉장고 안에 꽂혀 있었다. 농장에서 수확되어 시장까지 오는 내내 물을 못 먹고 있던 꽃은 해례의 정성스러운 손길에 꽃잎 끝까지 물을 머금고 탱탱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해례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호텔에서 일할 때는 주로 결혼식이나 큰 행사 꽃장식 업무를 해온 터라 혜래는 손님들이 ‘꽃말’에 그렇게나 큰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요 며칠 사이 간간히 들렀던 손님은 들은 모두 ‘꽃말’이라는 단어를 제일 먼저 입에 올렸다.

  “이렇게 예쁜 꽃이 눈앞에 있는데... 다들 눈에 모이지 않는 것만 찾고 있는 것 같아.”

  “근데 뭐, 세상 편하네... 꽃 만 항송이 딱 주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다 알 수 있잖아. 남자 친구가 무심하게 준 꽃이 저런 의미면 감동스럽기는 하겠다. ‘나는 당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남자 목소리까지 흉내 내가며 혼자 신나게 떠들고 있는 은영을 바라보며 해례는 조금 심란한 기분이 되었다. 꽃말은 분명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그 많은 꽃말을 다 갖춰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종류의 꽃을 들여놔야 하는 것일까. 낭만적인 상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영은과 달리 해례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네, 트리 앤 바이올렛입니다.”

  “여보세요. 거기 트리... 아, 꽃집이죠? 제가 사과할 일이 좀 있어서 꽃을 선물하려는데요... 흰 장미 15송이가 그런 의미 맞죠?”

  “아... 흰 장미 15송이가 사과...”

  그 순간 해례가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그런 말은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를 더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냉장고 안에서 분홍색 장미와 빨간 장미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보라색 히야신스나, 수선화도 사과의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셋 중에 뭐가 좋을까요?”

  “지금... 저희는 세 가지 다 없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해례가 어렵게 꺼낸 그 말에 손님은 다급한 신호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뚜 뚜 뚜뚜.

  ‘상징의 세계’. 꽃이 아름다움을 넘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그것은 바로 상징으로 넘쳐나는 ‘꽃말의 세계’였다. 해례가 꽃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빼앗겼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꽃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주고 싶은 것은 예쁜 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었다는 것, 자신의 메시지였다는 걸 해례는 미처 몰랐다.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꽃 속에 숨어 있기를 원했는데, 사실 꽃의 진짜 역할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었다니... 해례는 현실적인 고민을 넘어 자신이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꽃집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해례는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은 돌고 돌아서 또 사람들 곁으로 온 것이다.

이전 02화 그것은 장차 피어날 꽃의 씨앗같은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