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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oha Oct 06. 2022

12월, 영원을 말하는 푸른 잎

[소설] 나비가 손님인 꽃집 5

정신없는 일상이 흘러갔다. 엄마와 정호 아저씨를 초대해서 꽃집을 보여주었다. 말끔하게 단장을 한 모습에 칭찬을 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눈에 가득 담겨있는 근심을 해례는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도 깨끗하게 잘 정리했구나. 꽃이 있으니깐 내가 사무실로 쓸 때와는 완전히 달라 보이는데….”

  “정호 네 덕분에…. 아담하니 좋다. 골목 안이라도 조금만 나가면 큰 도로가 있으니깐, 열심히 해봐야지. 그나저나 시집이나 가면 딱 좋겠구만.”

  스무 살을 막 넘겼을 때 해례는 동네에 새로 생긴 고기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손님 테이블에 있던 불판을 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가게 밖에 서 있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눈으로 라도 엄마를 불렀지만, 엄마는 왠지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날 밤 엄마는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면 안 되겠냐는 말을 꺼냈다. 그렇게 힘든 일 말고 말이야. 다른 일은 없는 거야? 아르바이트가 다 그렇지 뭐. 너라도, 다른 일을 했으면 좋겠어. 졸업하면, 지금은 학생인데 뭘…. 엄마는 꼭 그날, 해례가 마주쳤던 그 슬픈 눈을 하고 웃고 있었다.

*

  “뭐? 정민이가 온다고?”

  “너도 기억나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알지. 내가 걔를 왜 몰라. 그나저나 걔는 요새 뭐한데?”

  “대학원 준비?”

  “대학원을 졸업해도 시원치 않을 나이에, 뭐 대학원 준비? 대학도 삼수해서 들어가더니 대학원도 삼수라도 할 작정인가 보네. 여전히 뜬구름만 잡고 있는구나. 걔는 전생에 선생님 못돼서 한이라도 맺힌 거야?”

  “뭘 또 그렇게까지 얘기해?”

  “아니, 내가 결국 등록도 못하고 고졸로 남은 게 말이야, 우리 아빠는 그 대학은 대학도 아니라고 등록금 못준대서 그런 거 아니야. 한 번만 주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해도 뭐 창피하데나 어쨌다나…. 그런데 그 대학을 나와서 선생님을 하겠다고 여태 그러고 있단 말이야?”

  “다른 대학도 다닌 것 같던데…. 나도 잘은 몰라. 걔가 워낙에 가방끈이 길어야 말이지. 그냥 지나가는 말로 얘기했더니 꼭 와보고 싶다고 해서.”

  “너는 걔랑 아직까지 연락을 하고 있었던 거야? 의외네….”

  “어쩌다가. 나도 고등학교 때 애들이랑 거의 다 연락이 끊어졌어.”

*

  “요즘 좀 산다는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꽃꽂이 배우는 게 유행이라잖아. 내가 상일동에서 과외를 하는데… 그 동네가 알아주는 부촌이잖아. 아, 너희들도 알지? 새로 생긴 헬로우 리치 타워. 거긴 각 층마다 경비실이 있는데 말이야… 평수가 60평 아래로는 없지 아마. 하여튼 그런 아파트 상가에서 꽃꽂이 수업을 하면 잘 될 텐데…. 너는 경력도 있으니깐. 그런데 이런 동네에서는 좀 그렇지 않니? 샵도 좀 그렇고. 큰 외제차 같은 거 끌고 오면 이런 골목에는 주차할 곳도 없겠다, 그렇지? 인테리어 좀 하고 그러지. 내가 학교에 있을 때 동료 선생님들이 말이야…. 아, 근데 영은아, 너는 요즘 뭐해? 대학은 정말 안 간 거야? 어쩌려고 그런….”

*

  “정민이 걔,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헬로우 리치 타워는 뭐야? 우리가 거기 가 볼 일 없다고 아무 말이나 그냥 막 던진 거야 뭐야? 뭐, 층마다 경비실 같은 소리 하네. 게다가 지가 뭔데 샵이 좀 그렇다는 거야? 그리고 동네에서 초등학생 산수도 못 가르칠 년이 어디 와서 잘난 척이야? 동료 선생님들은 무슨…. 게다가 뭐, 어쩌려고 대학을 안 갔냐고…. 부모님 등골 빼서 십 년 동안 공부만 한 게 자랑이다. 너는 뭐 저런 애랑 연락을 하고 그러니?”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희극이라는 유명한 말도 있지만, 진짜 가까이에서 보면 악다구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토리 키'를 재어서 뭣 하겠냐 만은 악다구니를 써 가며 서로 키를 재는 것이 바로 우리 모습이 아닐까. 조금이라도 더 커야 직성이 풀리는 쪽이 있다면 그 반대쪽은 악다구니라도 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놔둬. 그래도 잘 나가는 친구 하나 있으면 좋잖아. 우리 보기에는 답답해 보여도 저러다 진짜 선생님이 되고, 시집이라도 잘 가면 우리랑 딴 세상 사람 되는 거잖아. 혹시 아니? 그럼 ‘동료 선생님들’이라도 좀 소개해 줄지….”

  “웃기지 마. 걔 행색을 봐라. 어디가 잘 나가 보이디? 우리 나이쯤 되면 다들 옷이며 가방이며 얼마나 신경 쓰고 다니는데. 걔나 우리나 별 차 없어. 그냥 우리라면 저도 잘난 척 좀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온 거지 뭐. 너 혹시 걔가 큰 외제차라도 끌고 올까 봐 기대하는 거야?”

  “기대는 무슨…. 나도 사실은 또 올까 봐 겁난다.”

  “야, 먹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한방에 보내버리는 독초 없냐? 아니면 ‘또 눈에 띄면 죽는다’ 이런 꽃말을 가진 꽃은 없냐고? 옛날에도 그러더니 아주 꼴 보기 싫어 죽겠어.”



 

  꽃말이라는 게 있어. 옛날, 저기 먼 곳에 사람들은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꽃을 선물했데. 그래서 모든 꽃은 저마다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 그 꽃말은 둘만이 아는 암호가 되기도 하고, 차마 밖에 꺼내지 못한 말을 전해주는 훌륭한 전달자의 역할도 했단다. 어때, 꽃만큼 아름다운 얘기지? 창고에 자리 잡은 할머니 고양이에게 해례가 처음 사료를 부어줄 때, 물그릇에는 작은 장미꽃이 꽂혀 있었다고 했어. 장미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꽃이거든.



 

  그렇게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가고 자연의 계절도 한 결 깊어진 가을이 되었다. 언제나 한 계절을 앞서야 하는 꽃집은 겨울을 준비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누군가는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따뜻한 이불속을 떠올리겠지만, 해례의 겨울은 아무래도 극심한 추위와 함께 해야 할 것 같았다. 마땅한 냉, 난방 시절을 준비하지 못한 해례는 작은 난로를 하나 마련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너무 따뜻한 것은 꽃에 좋지 않을 것 같았고, 사실 꽃집 안을 ‘너무 따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정호 아저씨의 작업장에는 연통이 날린 커다란 난로가 있었는데, 나무 조각을 던져 넣으면 작업장 안은 금세 훈훈해졌다. 너무 추운 날이면 해례는 그 난로 앞에서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가장 곤혹스러운 일은 찬물에 손을 담그는 일이었다. 물을 갈아 줄 때마다 꽃가지마저 깜짝 놀랄까 싶어, 전기 주전자로 물을 데워 조금씩 섞어 주었다. 사실은 따뜻한 물에 해례가 꽁꽁 언 손을 담그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아무래도 꽃집 안에 수도를 설치해야 할 것 같아요. 날이 추워지니깐 물을 뜨러 화장실까지 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꽃집을 준비하면서 가능한 한 번거로운 일은 모두 생략하려다 보니 몸이 고생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해례는 괜히 민망한 얼굴이 되었다.

  “진작에 수도 공사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한 번 알아보마.”

  해례가 도움을 청할 곳은 역시 정호 아저씨뿐이었다. 꽃집을 찾는 손님은 좀처럼 늘지 않았고, 제집처럼 드나들던 영은마저 추위가 견디기 힘들었는지 발걸음이 뜸해졌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으니 해례는 크리스마스트리도 만들고, 리스도 만들어서 분위기를 좀 내 볼 참이었다. 

  작업장에서 나오자 차가운 공기의 냄새가 코를 얼얼하게 에워쌌다. 절로 움츠러드는 몸을 조금이라도 덥히기 위해 스웨터 자락을 황급히 여몄다. 그 익숙한 냄새와 그 익숙한 동작 속에서 해례는 처음 서울에 올라갔던 때가 떠올랐다.

  겨울의 중간을 가르며 서울에 짐을 풀었다. 엄마는 봄이라도 되면 올라가라고 말렸지만 해례는 왠지 마음이 바빴다. 인터넷으로 대충 둘러보고 예약한 고시원은 을지로의 어두운 골목길 안에 있었다. 낡은 건물의 계단은 음침했고, 방문을 열자 왜 다른 곳보다 가격이 저렴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짐을 풀고 편의점에 가기 위해 골목길에 내려서자 이미 사방에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인쇄골목과 가구골목이 뒤섞인, 어딘지도 모를 그곳은 이미 모든 가게가 영업을 끝낸 뒤라 불빛이라고는 가로등이 하나가 전부였다. 여기가 내가 아는 서울 맞아? 태어나서 처음 서울이라는 곳에 발을 디뎌놓고 그때 해례는 거기가 자신이 아는 서울이 맞는지 의아해했다. 그리고 텔레비전이나 이야기 속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또 다른 서울의 모습이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추위였다. 겨울에도 눈을 자주 볼 수 없는 남쪽 지방에서 올라온 해례에게 습기를 가득 머금은 서울의 차가운 공기는 20대의 그녀마저도 뼈가 시릴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다음 날부터 눈이 내렸다. 그리고 며칠 후에도, 또 며칠 후에도. 몸을 웅크리고 좁은 골목을 종종거리며 뛰었지만, 간간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던 골목의 끝은 자구만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이 앙상한 골목을, 이 궁색한 고시원을 나는 언제쯤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해례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작업대 위에 이리 저리 펼쳐놓은 초록색 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쾌하게 머리가 맑아지는 냄새가 부러진 나뭇가지 끝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주목, 구상나무, 전나무, 향나무, 측백나무. 가느다란 바늘잎을 달고 겨울에도 싱싱한 초록을 간직한 잎들이 꽃시장에 한가득 깔려 있었다. 해례는 그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 와 지금 작업대 위에서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바늘잎이지만 나무마다 모양이 달랐고, 초록색 잎이었지만 나무마다 다 다른 초록색이었다. 잎의 색을 표현하는 단어가 초록색 한 가지밖에 없는 것이 해례는 늘 안타까웠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식물의 잎은 다 다른 초록색인데 언제나 그저 ‘초록색’이라고 말해야 하다니. 몇 가지 질감과 색감을 더해주기 위해 회색빛이 도는 유칼립투스와 넓은 잎 뒷면이 갈색 융단 같은 태산목 나뭇잎도 준비했다. 태산목은 남쪽 지방에서 잎을 떨어뜨리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였다.

  이 나무들을 잘 엮어 동그란 리스를 만들 것이다. 외국 영화에서 보면 집집마다 현관문 앞에 하나씩 걸려 있는 리스는 어린 해례의 눈에는 먼 나라의 풍요의 상징처럼 보였다. 반짝이는 볼을 달거나, 전구를 감고 리본을 묶기도 하지만 해례는 생나무 가지를 엮어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장식처럼 시나몬 스틱이나 말린 오렌지 슬라이스를 꽂아놓으면 아주 멋진 향이 났다.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장식을 대중화시킨 건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는 소설이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이었던 알버트 공이 고향인 독일에서 들여와 소개한 것인데, 소설을 통해 대중화된 것이다. 그 이국의 문화가 이제는 이곳에서도 당연한 것이 되었으니, 해례도 공장에서 플라스틱이나 비닐로 만든 조악한 장식품이 아닌 진짜 크리스마스 장식을 만들고 싶었다. 게다가 겨울나무 향을 집 안에서도 맡을 수 있도록. 

  "누군가 사러 오면 좋겠는데..."

  굵은 철사를 이용해 동그란 틀을 만들고, 짧게 자른 가지를 종류별로 번갈아가면서 하나씩 엮어 나갔다. 싱그러운 나무 냄새에 취해서 하나씩 엮어 가다 보면 불안했던 마음도, 갖가지 걱정들도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볼이 차갑게 얼어붙어도, 철사를 감고 있는 손이 시려도 해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은 채 자기만의 세계로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뾰족한 잎을 가진 나무들은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는 단다. 너희들도 밖에 나가면 곧 보게 될 거야. 아니, 저 창문 밖에 감나무 보이지? 따뜻한 봄에 새순이 나왔다가 여름이 되면 커다란 잎들이 온 나무를 뒤덮게 되지.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면 점점 색이 변하다가 이내 다 떨어져 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는 거야. 

  해례는 겨울에도 초록색을 간직한 잎들이 ‘영원’을 상징한다고 했어. ‘영원’이 뭐냐고? 그건…. 엄마도 잘은 모르지만… 변하지 않고 지금처럼,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저기 먼 곳의 사람들은 그 초록색 나무 아래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데. 그 초록색 잎과 가지를 동그랗게 엮는 거야. 그걸 ‘리스’라고 불러. 해례는 리스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아. 날씨가 추워지면 리스를 잔뜩 만들어서 문 앞이나 벽에 걸어놓고 그 잎이 바싹 마를 때까지도 그대로 두는 거야. 해마다 사람들이 해례의 리스를 사려고 오기도 한단다.

  동그랗게 엮는 리스 역시, ‘영원’을 상징한데. 시작도 끝도 없는 동그라미가 해례는 좋데. 그리고 그 리스를 문 앞에 걸어놓으면 기다리던 손님이 온다고도 했어. 뭐, ‘영원’이 좋은 거냐고? 글쎄, 그건 말이야…. 12월이 되면 이제 일 년이 끝나는 거야. 날씨도 추워지지만, 주변의 모든 초록색들이 자취를 감춰버리지. 옛날 사람들은 마치 모든 생명체가 죽어버린 것처럼 느꼈데. 세상이 끝나버린 것처럼. 초록잎이 돋아나는 봄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한 거야. 그러면 항상 초록색을 간직한 바늘잎으로 만든 리스를 걸어두는 거지. 그렇게 세상은 끝나기 않고 영원하다고 안심시키는 거란다.

  엄마도 해례가 무엇이 영원하기를 바랐는지는 잘 알지 못해. 하지만 할머니 고양이도 엄마 고양이도 우리 고양이 가문이 영원히 지속되기 바라셨으니깐 ‘영원하다’는 건 좋을 게 아닐까? 

  뭐? 해례가 기다리는 손님은 왔냐고?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꽃집을 찾아왔지만, 기다리던 사람이 온 건지는 엄마도 모르겠는데…. 우린 아직 해례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구나.




  해례가 준비한 크리스마스트리와 리스를 사 갔던 손님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 환불을 위해 다시 꽃집을 찾았다. 리스를 배경으로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 사진을 프로필 사진에 올려두고서, 집에 어울리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해례는 별 말없이 순순히 환불을 해 주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환불을 요청하며 해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눈빛에서는 해례가 만든 리스에 대한 비난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작은 꽃집 안에서 해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철저하게 혼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례를 찾아온 또 다른 손님이 있었다. 온몸이 눈처럼 하얀 고양이는 특이하게 양쪽 귀 사이에만 까만 얼룩이 묻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검은 물감을 머리 위에 떨어뜨린 것처럼. 몇 날 며칠을 어둑한 골목에 서서 해례가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때맞춰 열어준 문으로 순순히 걸어 들어온 것이다. 

  이미 동네의 절반이 빈집이 되어 밤이 되면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살던 사람들은 떠밀리듯 모두 떠나갔는데, 빈집은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다. 후에 ‘미국발 금융위기’라든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불려졌지만, 정작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 던 해례는 어두운 골목길 저편을 바라보며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남들이 ‘IMF 시대’ 때 진짜 힘들었다고 하지만 엄마는 IMF가 뭔지도 몰랐어. 돈이라면 씨가 마른 집에 특별히 더 어려운 때가 있어야 말이지. 매일매일이 다 어려운 시절인 거야. 우리는.”

  사뿐사뿐 내딛는 고양이의 발걸음에는 차가운 공기가 묻어났다. 

  “나비야, 이렇게 추운데 밖에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고양이는 해례가 놓아둔 간식 그릇 앞에 멈춰 서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나비라고 부르면 될까? 우리 할머니는 말이야, 어릴 때 고양이를 ‘살진아’라고 부르셨는데….”

  다음 날 밝은 대낮에 꽃집을 찾은 ‘나비’는 해례가 모는 대로 고분고분 창고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아침 일찍 슈퍼에 가서 얻어온 과자 박스 안에. 해례가 순순한 기쁨으로 맞아드린 첫 번째 손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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