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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oha Oct 12. 2022

1월, 장미가 사랑의 상징이 된 것은..

[소설] 나비가 손님인 꽃집 6


  해례는 꽃집 ‘트리 앤 바이올렛’에서 어느덧 세 번째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작은 꽃집은 변함없이 그곳에 있었지만 해례는 이제 서른두 살이 되었다. 휴... 그리고 그럭저럭 버텨 낸 스스로에게 안도했다. 블로그에 열심히 꽃에 관한 글을 쓴 덕분에 외진 꽃집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었다. 인터넷에서 해례의 글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녀가 꾸려나가는 소박한 그곳을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신비한 장소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너무 궁색하고 말도 안 되게 소박해서 말이다. 마치 해례가 자신의 진짜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변장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돈 버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세상에 발 붙이기보다 유영하듯 떠다니며 아름다운 것을 쫓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 당신의 순순한 마음을 전해 줄 유일한 사람. 그것은 살아있는 ‘사랑의 메신저’가 아닐까 하는. 이렇듯 그녀는 자신의 처절한 궁핍함을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바꿔 놓았다. 그리고 사랑의 시를 읊는 ‘음유시인’의 역할을 자처했다. 아니, 최소한 그렇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해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분명히 현실 속의 이야기였지만 몇 가지 사실만 덜어내면 환상처럼 달콤한 사랑이야기가 되었다. 해례의 손길을 거쳐 비현실적이 되고만 이야기 덕분에 사람들은 ‘트리 앤 바이올렛’이 진짜 사랑의 현장이라고 믿기 시작한 것 같았다. 중세 시대 연인들을 설레게 했던 밀폐된 정원처럼. 하지만 정작 해례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이른 아침,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는 해례의 눈에 핸드폰의 깜박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드라이기를 끄자, 그제야 벨소리가 귀에 들이치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에 전화 올 데가 없는데….

  24시간 대중없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는 손님 덕분에 해례는 집에서 핸드폰 벨소리만 울려도 신경이 예민해졌다.

  “여보세요.”

  잠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조금씩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상대방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굴까?

  “저…. 꽃집인가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아직 영업시간 전입니….”

  해례는 상대방에게 아직 영업시간 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 상대는 급하게 그녀의 말을 막아 세웠다.

  “강인성이라는 남자 손님, 혹시 기억하세요?... 그 사람이 제 남편인데요….”

  “네? 무슨 일로….”

  “그 사람이 자주 꽃을 보내죠? 다 확인하고 전화드리는 거예요.”

  사이사이 훌쩍 거리는 소리와 함께 느리게 이어가던 상대방의 말이 다시 빨라졌다.

  “꽃을 보내는 곳이 어딘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 여자 이름이랑 연락처도요.”

  해례는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여러 가지 이유로 기억이 나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는 없다. 해례가 아무 말이 없자 상대방의 목소리는 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곤란하시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제가 이러는 거 같은 여자끼리 이해 못 해 주나요? 게다가 지금 임신 중이라….”

  여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엉엉 울고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잎과 꽃의 미묘한 떨림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따뜻한 공기를 펄펄 일으켜 꽃집 안을 훈훈하게 채우고 싶었지만, 1월의 공기는 실내에서도 쉽사리 덥혀지지 않았다. 해례는 꽃집에 나와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휘황찬란하고 북적이던 12월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1월은 차분하게 자라 앉아 있었다. 변함없는 하루하루가 숫자로 어떻게 구분되느냐에 따라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지다니 해례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또다시 한 해의 시작 앞에 선 해례는 잠시 설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또 1년을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힘이 빠졌다. 한 단계를 ‘클리어’ 했지만 레벨 업은커녕 또다시 제자리인 게임 같았다. 아무래도 아침에 받은 전화가 신경이 쓰였다.

  울음을 터뜨린 여자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걱정하는 것과 별개로 해례는 단호했다. 꽃집에서는 으레 겪는 일이기도 했다. 밸런타인데이나 로즈데이 같은 기념일에 여러 군데로 꽃을 보내는 남자도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꽃집으로 직접 와서 여러 개의 꽃다발을 사가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 이유까지 해례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손님에 대한 개인적인 사정까지는 더더욱.

  눈앞에 펼쳐진 주문서에는 언젠가 전화로 받아 적었던 강인성 손님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내 마음 아실이, 사랑을 보냅니다.” ‘눈처럼 희고 순수한 꽃으로만!!’이라는 메모가 덧붙여져 있었다.

  해례는 그 손님에게 주문을 받을 때 감각이 좋다는 칭찬을 건넸다. 남자들은 무조건 빨간 장미만 장미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다양한 꽃을 보여주려고 했던 해례의 의지를 쉽사리 꺾어놓았다. 흰꽃은 장례식에나 쓰는 꽃이 아니냐며 다들 손사래를 치는데….

  아버지는 소문난 바람꾼이었다. 노름꾼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어른들은 어린 해례를 보자마자 “느이 아빠 요새는 바람 좀 덜 피냐?”라며 말을 건넸다. 그것은 안녕, 잘 지냈니? 같은 뜻으로 해례만을 위한 인사법이었다. 바람을 피우는 건 아버지였는데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언제나 그녀였다. 해례는 덕분에 기가 막히게 바람피우는 남자를 잘 알아봤다. 유난히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그러면서도 빠르게 주변을 흘깃거리는 바쁜 눈동자, 입 주변으로 퍼지는 비열한 웃음까지. 어린 그녀는 전화기 버튼을 누르는 아버지의 다급한 손길만 봐도 어디에 전화를 거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손길에서 전화번호를 알아채기도 했다. 아버지가 전화를 끊고 자리를 떠나면 해례는 쪼르르 전화기 앞으로 달려가 얼른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 확신이 든 해례가 엄마에게 전화번호를 건네면 집안에는 한차례 폭풍우가 몰아쳤다.

  임신까지 했다는데... 한 해의 시작이 꽤나 시끄러웠겠네.

  바람피우는 걸 알아채 봐야 돌아오는 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집안 분위기뿐이었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 행동해야 하는 것도 그녀였다. 그때부터 해례는 모른 척하는 법을 배웠다. 꽃집에서도 손님이 누구를 위해 꽃을 사는지 해례는 묻지 않았다. 일부러 이야기를 꺼내도 애써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남자들이 꼭 한 여자 에게만 꽃을 선물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해례는 충분히 모른 척해 줄 자신이 있었다. 결국 엄마도 모른 척하는 쪽을 택했으니까.



 

  장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꽃이란다... ‘사랑’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지. 그저 아무 말 없이 장미 한 송이를 건네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몰라. 종류가 엄청 많아서 해례가 매일 손님들에게 장미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주는 소리가 들려. 사랑스러운 분홍빛의 ‘해라’, 수줍게 물든 뺨이 떠오르는 ‘신시아’, 매력적인 보라색 장미 ‘5번가’, 결혼식 부케에 잘 어울리는 ‘줄리엣’, 사랑스러운 들장미 같은 ‘메건’... 그리고 눈부시게 순순한 하얀 장미 ‘마릴린 먼로’.



 

  눈처럼 하얀 장미로 해례는 ‘마릴린 먼로’를 골랐다. 완벽하게 흰색을 가진 장미는 보기 드물어서 크림색이 우아한 장미였다. 향기마저 아름다운 꽃이었다. 눈처럼 몽글몽글한 작은 꽃송이가 매달려 있는 스톡과 여린 꽃잎이 하늘하늘한 리시안셔스도 흰색이었다. 한데 모아 놓으니 하얗게 빛나는 눈밭처럼 눈이 부셨다. 해례는 그 연약한 꽃들이 망가질까 싶어 배달도 직접 갔다. 교실 문을 열고 나온 긴 머리의 여자는 꽃을 보자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 참이나 웃었다. 그때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시끌벅적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해례는 정말이지 눈치 채지 못했다. 아름다운 연인이라고만 생각했다.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점잖은 목소리의 남자는 보지 않아도 그 여자와 무척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해례는 자신이 이제 목소리와 말투만으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장미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분신으로 여겨졌다. 연인 아도니스의 죽음을 슬퍼하며 흘린 눈물이 장미가 되었다. 혹은 죽어가는 아도니스를 살리려다 장미 가시에 발이 찔리게 되는데 이때 흘러나온 피가 하얀 장미를 붉게 물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붉은 장미는 ‘열정적인 사랑’을 말하는 꽃이 되었다. 그리고 흰 장미는 전통적으로 순결한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다. 

  거기까지 썼을 때, 해례의 손이 자판 위에서 그대로 멈췄다. 블로그에 장미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다. 입에서 갑자기 ‘순결’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래. 그 손님은 ‘순수’라는 단어를 말했었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애인에게 꽃을 보내면서 그는 ‘순수한 꽃’을 이야기했고, 해례는 그 순간 자신이 아마 성모 마리아라도 떠올렸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례는 그 손님과의 전화통화를 떠올려 보았다. 그의 목소리 어디에도 해례가 알고 있는 바람피우는 남자의 비굴함과 조심스러움은 없었다. 오히려 단정하고 당당했으며 순수하기까지 했다. 그 태도에 비춰 본다면 해례에게 전화를 걸었던 부인이라는 여자가 애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람의 감정이 희한한 게, 뻔뻔함이 지나치면 순수함마저 느껴질 때가 있었다!

  장미는 가시가 있는 꽃이다.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으면 가시에 찔리는 일이 부지기수다. 해례는 꽃 정리를 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앗’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갈고리 모양의 가시가 손가락 깊숙이 박히면 절로 눈물이 찔끔거렸다. 그 가시를 손으로 일일이 떼야하는 장미도 있었다. 사랑을 전하려다가 손가락에 붙이는 밴드까지 선물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장미가 보내는 경고 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아무리 장미꽃처럼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덥석 잡으면 결국 손가락을 찔리고 만다는. 장미의 가시를 제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랑의 가시는 해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례는 머리를 힘차게 저으며 두 사람의 목소릴를 잊으려고 애썼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장미는 아주 오래된 꽃이란다. 어디에서나 잘 자라고 어디에서나 있었지. 아마 너희들이 그 향기를 맡아본다면... 해례가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너희들도 그 아름다운 향기를 알게 될 텐데. 이 우중중한 창고도 순식간에 아름답게 보일만큼 좋은 향이 난단다. 생선 뼈보다 더? 벌레들보다 더 말이에요, 엄마? 그럼. 그것 보다 더.

  게다가 보드라운 꽃잎이 여러 장 겹쳐진 그 풍성한 꽃을 본다면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니? 그래서 아주 먼 옛날, 먼 곳의 사람들은 장미가 만발한 정원에서 연인을 만나는 이야기를 좋아했단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를 선물하고, 장미의 향은 사랑하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지.



  

  이야기의 흐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해례가 운영하는 블로그가 어느 날부터 이상한 댓글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돈에 눈이 멀어서’, ‘임신한 사람의 부탁을 외면 한’, ‘파렴치한’ 이런 구절들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해례는 마우스에 올려진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차마 완성된 문장은 읽을 수 없었다. 해례는 결국 눈을 질끈 잠아버린 채 노트북을 힘껏 닫아버렸다.

  어린날의 해례처럼 바람을 피우건 아버지인데... 바람을 피운 건 그 여자의 남편인데... 부끄러움은 언제나 해례의 몫이었다. 댓글을 아무리 지워도 다음 날이면 여기저기에 또 달렸다. 누군가 해례가 정성스럽게 가꾸어 놓은 꽃밭을 마구 짓밟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해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빨리 이 상황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부지런히 댓글을 지우는 것 밖에는. 그것이 해례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건너 건너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사실이에요? 그 여자가 아주 이를 갈고 있다던데….”

  손님들 사이에서도 그 일은 잊을 만하면 다시 입에 올려지기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여자들에게 예민한 주제다 보니 꽃집을 자주 찾던 사람들조차 몇몇은 발길을 끊어버렸다. 

  세상이 이렇게 좁구나. 

  “저는 그저 꽃을 파는 것뿐인 걸요. 손님들의 개인 사정까지 일일이 알 수 있나요. 알 필요도 없고요. 그분들끼리 알아서 할 일을…. 아무래도 그 아내분이 비난의 대상을 저로 정했나 보네요. 희한하게 전남편이나 그 애인이 아니라….”

  아직도 그 아내가 전남편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주는 손님도 있었다. 해례는 엉뚱하게 자신의 인격마저 공격당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아직 잊지 못하는 전남편과 누군지도 모르는 애인이라는 여자를 미워하기는 쉽지 않겠죠. 그렇다고….”

  “그래도 임신한 여자가 모르는 사람한테 전화까지 해서 부탁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예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을 모두가 같은 ‘아내’라는 이유로 편들고 있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일이 먹고사는 일이라고요. 게다가 낯선 사람의 말을 무조건 믿을 수도 없는 거고요.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손님과의 일을 다를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의무 정도는 저에게도 당연히 있답니다.’

  하지만 해례는 이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남은 비난마저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다른사람에게서 찾아내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쉽게 비난 할 대상을 찾으면 마음이 편해 지는 건지도 몰랐다. 해례는 사람들을 붙들고 자신을 비난하는 아내의 모습 떠올려 보았다. 마치 그 순간 그 아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자신이었고, 자신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그 남편이 된 것 같았다. 해례는 그 손님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장미가 사랑의 상징이 된 다른 이유가 있다. 장미는 수세기 동안 재배되었고,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 그리고 야생 장미와 재배되는 장미의 교배가 언제든지 가능해 현재 아주 다양한 품종이 존재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장미를 오래 볼 수 있지만 그 옛날의 장미는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가 무색할 만큼 빨리 시들어 버리는 꽃이었다. 게다가 줄기에는 무시무시한 가시까지 숨기고 있었다. 이것보다 더 ‘사랑’과 닮은 모습의 존재가 세상 어디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장미'라는 꽃으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장미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 되었지만 사실 이런 진짜 모습을 감춰두고 있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더라도 금방 시들어 버리고 마는. 희한하게도 장미는 말려도 그 향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랑의 기억이 마음속에 내내 남아 있는 것처럼.

  해례는 오늘도 사랑 앞에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자신처럼 어린 날 이미 사랑을 믿지 않게 된 불행을 겪지 않은 그들을 어쩌면 부러워해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여전히 그 못 믿을 감정에 울고 웃는 사람들을. 중세시대 장미정원은 ‘낙원’의 현시였다.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그곳은 곧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밀회의 장소가 되어 이야기 책 속에 등장하게 된다. 그 책을 돌려보던 사람들은 장미가 만발 한 그 곳을 동경하게 되었고, 그런 낭만적인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사랑하는 연인에게 장미를 선물하게 된 것이다. 장미는 성스러운 꽃이었다가 욕망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낙원은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이고,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며 사랑은 단 한 번도 ‘진짜’였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례는 자신의 블로그에 접속해 또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 가고 있었다. 결국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환상’이니까. 



 

 해례가 장미꽃 백송이를 한 아름 꽃다발로 만든 적이 있어. 천송이로 만든 꽃다발과 오백 송이로 만든 꽃바구니도 있었다는 데 그건 직접 보지 못하고 이야기로만 들었단다. 어때, 굉장하지 않아? 붉은 장미 백송이를 하나하나 다듬을 때는 이파리와 가시가 산처럼 쌓였단다. 분홍색 장미로 꽃바구니를 만들 때는 장미 정원을 만드는 기분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어. 그리고 감동적이라고 했지. 해례는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단다. 사랑도 영원할 수는 없는 거야. 어떤 순간 그렇게 크고 강력한 사랑이 나에게 존재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아. 저기 말이야...

  오스틴이 새끼들을 보며 손으로 창고 입구를 가리켰다. 저기에 언제나 큰 쓰레기봉투가 놓여 있었어. 해례는 시든 꽃이 있으면 모아다가 저기에 버리곤 했었지. 그럴 때마다 “이렇게 쉽게 시들어 버리다니... 참 허무하네.” 하고 아쉬워했지만...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꽃은 한순간 최선을 다해 정말 아름답게 피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해례가 말해줬거든. 정작 우리는 온갖 두려움으로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니깐. 그런 왜? 그런데 왜 해례가 쓰레기 봉투 앞에서 그런 말을 했냐고? 글쎄... 해례는 종종 자기가 한 말도 잊어버리곤 했어. 해례는 언제나 바빴으니깐. 이 세상에는 사랑이 넘쳐나고 해례는 언제나 '사랑의 메신저' 였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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