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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oha Sep 19. 2022

꽃이 질 때는 이별이라고 말하지 않아

[소설] 나비가 손님인 꽃집 1

 


  '음... 그러니까... 그날의 아침은 갑자기 찾아온 것 같아. 지금 나로서는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어. 해가 큰 창을 넘어서 환하게 쏟아지는데 여전히 사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어느 날이었지. 내 셈이 맞다면 분명히 일요일은 아니었는데... 그다음 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똑같았어. 그리고 냄새가 조금씩 달라졌어. 물기를 머금은 싱싱하고 향기로운 풀냄새가 조금씩 메마르고 풀풀 날리는 먼지 냄새로 바뀌기 시작한 거야. 처음에는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거든. 아, 그건... 아치가 밤마다 쓰레기봉투를 찢을 때 비슷한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고 말해 줬어. 뭔가 오래되고, 더러운 물이 고이고 그래서 섞어가는 냄새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날 이후로 더 이상 내 밥그릇에 촤르르하고 밥이 쏟아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나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도. 다 사라져 버렸어. 그래, 그날부터... 향기로운 냄새도, 내 밥도 그리고 웃음소리들도. 차양 아래서 방글거리던 이파리들도 이제 다 축 쳐져 버렸는 걸. 오늘 아침에 살펴봤더니 몇몇은 가지를 차양 밖으로 힘겹게 뻗어내고 있더군. 한 방울의 비라도 마셔 보려고 말이야. 나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거지. 아니야, 나는 쥐라도 잡을 수 있지만... 아치를 따라 쓰레기봉투를 찢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 작은 이파리들은... 가지를 뻗어 내기에 차양 밖은 너무 멀어. 그러다 곧 다 말라죽고 말 거야. 해례는 이런 사실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도대체 갑자기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거야? 아니면 해례는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걸까? 혹시...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다 버려진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니면... 혹시 내가?'

  그곳은 회색빛 건물들이 현란한 조명을 쏟아내는 화려한 거리의 뒷골목이었다. 그리고 한 낮이면 높은 건물들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비추는 곳에 오래된 ‘꽃집’이 있었다. 꽃집 옆에는 작은 창고가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멋진 얼룩 무늬를 가진 ‘오스틴’이라는 고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창고의 구석, 천정 가까이 매달려 있는 선반 위에 살고 있는 그는 조그만 창문을 통해 뒷집 감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스틴의 높이뛰기 실력이라면 풀쩍거리며 뒷집 지붕 위에 멋지게 착지하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붕 끝에는 달콤하고 진득한 홍시를 맛볼 수 있는 감나무도 한그루 서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면서 홍시는 다 떨어져 버렸고 지금은 앙상한 가지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창문으로 찬바람이 쌩쌩 불어 들어와 아무리 상자 안으로 파고들어도 오스틴은 자꾸만 코가 시렸다. 지붕에 올라가서 쥐를 잡으면 어떨까. 꼬르륵, 꼬르륵하는 소리가 작은 몸을 울렸다. 하지만 지금 오스틴의 뱃속에서는 꿈틀꿈틀하는 작은 움직임도 느껴졌다. 몇 마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평소에 납작하던 배가 언젠가부터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부풀어 오른 배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지붕 위에 멋지게 착지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창고에는 더 이상 불이 켜지지 않았다. 해례는 감나무에 홍시가 다 떨어질 때쯤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오스틴은 어두운 창고 안에서 벌써 며칠 째 꼬르륵, 꼬르륵하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지금 쯤이면 추운 겨울을 준비해야 하잖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이파리들을 안으로 들여놓고, 밖에서 겨울을 나는 이파리들은 따뜻하게 비닐로 감싸줘야 한다고! 차양 아래는 작고 반짝이는 알갱이들을 매달고, 안에서 들려오는 어린아이들의 쫑알거림으로 나를 화나게 만들어야 한단 말이야... 무엇보다... 이제 곧 아기들이 태어날 텐데... 나는 아기 고양이의 엄마는 처음인데... ’ 오스틴은 그 생각을 하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꽃집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물건을 ‘쾅’ 하고 내려놓는 소리, 사람들의 발소리, 웃음소리 까지. 모두 오스틴의 귀에 익숙한 소리들이었다. 순간 꽃집으로 통하는 작은 문의 테두리가 밝게 빛났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그럼 그렇지. 나를 두고 갈 리가 없잖아.' 오스틴은 재빨리 화분 몇 개를 밝고 바닥으로 뛰어내려왔다. 하지만 창고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내 밥을 제일 먼저 챙겨주지 않고,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짜증스러운 말투와 달리 오스틴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다시 선반으로 올라가 창문으로 빠져나온 그는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해례가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아기들이 꼼지락 거리는 배는 걸을 때마다 땅에 닿을 듯 출렁거렸다. '아가들아, 걱정 마. 해례가 돌아왔어.'

  꽃집 앞에 서 있는 건 다리가 긴 사람이었다. 긴 다리 끝에 하얀 신발이 우중충한 돌바닥 위에서 하얗게 빛났다. '뭐야, 해례가 아니잖아.' 노랗고 긴 털이 수북한 개도 한 마리도 옆에 있었다. 멍청하게 혀를 쏙 빼고 숨을 헐떡거렸다. 하지만 다리가 긴 사람은 잔뜩 뿔이 난 얼굴로 개의 귀를 손가락으로 돌돌돌 감았다가 풀기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오스틴은 재빨리 꽃집 앞에 있던 화분 뒤에 몸을 숨겼다. "너무 지저분하고 낡았잖아. 게다가..."  꽃집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이번에는 키도 크지 않았고 머리카락도 길었지만 그래도 해례는 아니었다. 얼굴이 잔뜩 찌푸러져 있는 데다가 딱딱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해례는 웃고 있을 때가 많았고 언제나 어린 여자아이들의 것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달랐다. '오스틴, 밥 먹자.' 들을 때마다 뭉글뭉글한 젖을 내어주던 엄마가 생각나는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주인이 급하게 가는 바람에 싸게 내놨어요. 무엇보다 안에 있는 물건도 그대로 다 사용할 수 있고요." 차가운 돌바닥과 냉랭한 황톳빛 화분의 촉감에도 아랑곳없이 오스틴은 두사람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당신들은 누구야? 해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엄마, 저기!" 그때 해례가 유리병을 깨뜨릴 때처럼 뭔가 쨍그랑하는 소리가 오스틴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이거 아침부터 망했는걸.' 섣불리 눈에 뜨였다가는 끝까지 따라붙을 것이 분명했다. 오스틴은 아이들이 싫었다. '아이라니!' 지붕을 올려다보며 돌을 던지던 남자아이의 얼굴이 생각났다. 화분 틈 사이로 숨는 자신의 꼬리를 끝까지 잡아당기던 여자 아이의 얼굴도 생각났다. '빨리 숨어야 해.' 하지만 속도를 낼 때마다 바닥에 살짝살짝 끌리는 배가 쓰라렸다. 하지만 잡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은 아이의 손 안에서 모래처럼 이리저리 부서질 것이 뻔했다. 오스틴은 일단 재빠르게 다시 지붕 위로 올라가 먼길을 돌아 창고 안에 있던 오랜 된 화분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이 몸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선반 위에 있다가는 키다리와 딱딱한 옷이 갑자기 창고 안으로 들이닥칠지 모른다. 다행히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노란 개가 창고 앞에서 낮게 아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바보가!' 오스틴은 억울한 마음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자신이 이리저리 쫓겨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헐떡이는 숨 끝에 목이 너무 말랐다. 창고를 떠도는 차갑고 낯선 냉기가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자신의 몸을 슬쩍 밀어내자 오스틴은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오스틴은 최대한 우아한 자세로 앉으려고 노력했다. 등을 곧게 죽 펴고 하얀 앞발을 가지런히 모은 다음 긴 꼬리로 둥그렇게 감싸 안았다. 해례는 오스틴에게 멋진 고양이라며 웃어 보였다. 해례는 웃을 때마다 볼살이 위로 밀려 올라가 눈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모습이 우스웠지만 또 그 모습이 좋았다. 그날은 오스틴이 해례 앞에 정식으로 처음 모습을 보인 날이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늦은 봄날이었고, 해례가 내뿜는 시원한 물줄기 끝에 싱그러운 장미향이 부서지고 있었다. “이 장미가 오스틴 장미야. 아름다운 장미를 많이 만들어낸 데이비드 오스틴의 이름을 딴 거지. 네 이름도 오스틴이라고 부르면 어때?" 그날부터 아기 고양이의 이름은 오스틴이 되었다. 해례는 엄마에게 '고양이 아줌마'를 줄여 '아짐'이라고 부르더니, 자신에게는 이렇게 멋진 이름을 붙여 준 것이다. 어딘가에서 숨죽이고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 엄마에게 빨리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스틴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눈도 더 동그랗게 떴다. " 다른 고양이 들처럼 도망가지도 않고... 정말 착한 고양이구나, 오스틴은..."

  오스틴... 내 이름...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가 ‘까악’ 소리를 내며 전깃줄 위에 내려앉았다. 위를 올려다보자 파란 하늘을 이리저리 가르고 있는 까만 전깃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위에서 까치들이 그네를 타는지 줄은 조금씩 들썩거리고 있었다. 작은 고양이는 마치 자신이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때 눈치 없는 까마귀가 또 한 번 까악 하고 울었다. '지금 나를 비웃고 있는 거야? 흥, 그래 봐야 너희들은 해례가 주는 물과 좁쌀을 얻어먹으러 온 것뿐이잖아.' 오스틴은 까마귀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해례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이제 해례는 그곳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특별하다고... 니들이 뭐래도 나는 이 꽃집에서 오래 살았단 말이야." "오래 살았다고? 너는 이제 조그만 아기 고양이인데? 두 달도 오래 산거라고 할 수 있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오스틴은 자신의 아름다운 긴 꼬리로 다시 한번 앞다리를 멋지게 감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리 엄마의 엄마, 또 그 엄마의 엄마 때부터 우리는 이 꽃집에 살았어. 그러니까 나는 꽃집에 오래 산거나 마찬가지야."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던 까치의 앞에 해례가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손에는 물이 담긴 양동이가 들려 있었다. 어느새 꽃집 앞에는 꼬질꼬질한 길고양이와 까마귀, 까치가 모여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구구구 소리를 내며 비둘기 세 마리도 뒤뚱뒤뚱 걸어오고 있었다. 해례는 금방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꽃집 앞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새들을 쫒으려는 듯 허공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뭘 주워 먹으려고 이렇게 모여 있누. 길에 있는 짐승은 얼마나 지저분 한지... 에잇, 저리 가지 못해." 

  "나 참, 나는 간식이나 탐내는 그런 고양이가 아니란 말이야." 오스틴은 아래로 향한 고개를 몇 번 내젓더니 한 숨을 내쉬었다. "난 뼈대 있는 고양이라고." "응? 뼈대가 있다는 게 무슨 말이야?" "음... 그건 말이지..." 야옹. 오스틴의 귀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지붕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엄마의 눈초리가 가늘어져 있었다. "아, 너무 오래 있었네... 그만 가볼게." 그 말을 들었는지 해례가 양동이에 든 물을 골목길에 쏟아 놓았다. 까마귀와 까치는 적절한 타이밍에 날아오르는 데 성공했지만 오스틴은 말이 물에 젖고 말았다. '아이고, 깜짝이야! 나는 발에 물기가 있는 건 정말 참기 힘든데...' 오스틴은 발을 탈탈 털며 나뭇가지를 딛고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그건 말이야, ‘오줌’에 비밀이 있어." "오줌?" "며칠 전에 네가 창고에서 소리 지르는 걸 들었거든. 너도 기억나지?" "아, 당연히 기억하..." 눈동자가 잠시 위로 향해 있던 해례는 뭔가 생각나듯 갑자기 오스틴을 흘겨 보였다. 오스틴은 색색의 리본이 풀어져 있는 포장대 위에서 뻔뻔하게도 포장지를 깔고 앉아 있었다. 해례는 한쪽 손에 힘을 줘 포장지를 당겼지만, 오스틴 엉덩이에 깔린 종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간식을 너무 많이 준 걸까...' 해례는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맞아, 내가 그 흙에 전부 오줌을 싸 뒀거든. 나는 네 옆에 있는 그 바보 개처럼 아무 데나 오줌을 누지 않아." 해례는 자신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순이의 두 귀를 가만히 손으로 감쌌다. "나는 깨끗한 흙이나 모래 위에만 오줌을 눈단 말이야. 내가 오줌을 눈 흙에서 자란 나무에 꽃이 피면..." "피면?" "그 꽃을 만진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그리고... 먹으면 노란 귤처럼 눈이 찌그러질 것 같은 냄새가 나는 저거 말이야." "로즈마리?" "나는 그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이제 저 이파리 가까이에는 가지는 않지만. 그리고 저기 저 빨간 꽃도 나팔처럼 생겼다고 네가 매일 들여다봤잖아. 그렇지? 저기도 내가 전부 오줌을 눴거든."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정말 토할 것 같네...' 해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전혀 흩어지지 않고 여전히 그녀 앞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며칠 동안 부지런히 해례 앞에 모습을 드러낸 오스틴은 그녀가 자신에게 멋진 이름을 붙여주자 드디어 말을 걸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지금 해례는 몇 번이나 헛웃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자신을 뺨을 때리기도 하면서 오스틴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이도 짖지 않고 꼼짝없이 오스틴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날씨가 벌써 많이 더워진 걸까? 아니면 내가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 어떻게 된거 아닐까?' "오줌은 더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흙에 들어가서 이파리가 예쁜 꽃을 피워 내도록 도와주기도 하잖아." "그럼 너는 친구가 많아? 오.줌.으.로. 만든 친구?" "음... 친구는 아직 너 밖에 없어. 나도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거든. 그 대신 엄마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그럼 너는 어떻게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 "음... 그것도 엄마한테 배운 거야." "엄마? 엄마 고양이, 그러니까 아짐 말이야? 아짐은 나한테 한 번도 말을 건 적이 없는 걸. 말은 고사하고 나만 보면 도망가고 숨기에 바빴다고. 새끼 고양이들은 죄다 나에게 맡겨 놓으면서 내 손길을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었어." "그건... 비밀이라서 그래 그리고 창고에 있으면 하루 종일 문틈 사이로 말소리가 들려. 그렇게 조금씩 배운 거야."  "우와. 말을 배우다니? 그리고 뭐, 고양이도 비밀이 있어?"

  "추운 겨울이었데. 엄마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가 처음 이 꽃집 처음 발견한 날 말이야. 그때 엄마 고양이의 뱃속에 아가들이 있어서 무척 배가 고팠다고 했어. 하지만 엄마 고양이는 춥고 어두운 골목길을 헤매느라 힘이 하나도 없었지. 그때 멀리서 불빛을 발견한 거야..." 가까스로 힘을 내서 그 불빛 앞에 도착했을 때, 엄마 고양이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유리 안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했다. 언젠가 보았던 무지개 빛깔처럼 신비하고 예쁜 색깔의 꽃들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병마다 꽂혀 있었다. 게다가 앙상한 가지만 바람에 날리는 바깥 풍경과 달리 초록색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는 나무들도 있었다. "몇 개는 동그란 열매도 달려 있었다고 하던데... 엄마는 안에 있던 사람이 자기를 발견 한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꽃집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아름다운 꽃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 엄마 고양이는 언제나 어두운 골목의 구석진 곳이나 쓰레기 더미 속에 숨어 있었으니까. 그렇게 매일매일 어둠이 골목이 집어 삼키고 나면 엄마 고양이는 그 환한 유리창 앞에 서 있었던 거야.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해례가 비릿한 냄새가 나는 뭔가를 그릇에 담아놓고 살짝 문을 열어 놓은 게 말이야. 엄마 고양이는 홀린 듯이 안으로 걸어 들어간 갔다고 했어. 마치 뭔가에 이끌리듯이 말이야.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 여기에 살고 있었어. 그리고 나는 그 긴 시간들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어. 음... 그건 마치... 고양이의 전설 같은 거야...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은 거기에 있어." "내가 진짜 미쳐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도 그 겨울밤이 기억나는 것 같아. 내 스무 살의 마지막 겨울이었던가... 그랬을 거야. 사실 정말 슬픈 겨울이었어." 그때 오스틴은 눈에 해례는 잠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항상 궁금했던 건 말이야..." "응?" "아빠 고양이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거야?" "다 모험을 떠났어." "모험?" "사실 고양들에게 이런 좋은 집은 경쟁이 심하거든. 다른 고양이들도 나처럼 여기에 살고 싶어 한단 말이야." 해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고양이들이 찾아올 때마다 아빠 고양이가 나서서 싸워야 해. 가끔씩 피투성이가 되어서 찾아오기도 하고,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해. 엄마 고양이가 밤새 핥아도 낫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엄마는 걱정하지 않았어. 해례가 맛있는 간식에다가 뭘 섞어서 주면 그걸 먹고 금방 낫는다고 했어. 그리고 몸이 나으면 또 싸우러 가는 거야. 우린 그렇게 여기서 지금껏 살고 있어. 해례, 네 옆에서 말이야. 우린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지." 그 말에 해례의 큰 눈이 더 동그랗게 커졌다. 하지만 그 눈 속에 가득 담겨 있는 자신의 모습이 오스틴의 눈에서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그래, 해례... 우린 너와 함께 살고 있었어.' 하지만 그건 꿈이었다. 설핏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캄캄한 어둠이 살을 에는 바람과 함께 몸속 깊이 파고들었다. '내가 말을 걸어서 그런 거야? 엄마 말을 듣지 않고, 너에게 말을 걸어서? 내가 비밀을 다 말해 버려서? 하지만... 그때 나는 아주 작은 고양이였어... 너도 기억나지? 페인트가 담겨있던 드럼통 안에 내가 빠졌던 날 말이야. 그래, 그날도 겨울이었지. 코를 찌르는 냄새와 차갑고 무거운 물이 나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고 말았어. 자꾸만 누가 당기는 것처럼 몸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던 거야. 엄마는 통 입구에 매달려서 애타고 나를 부르고 있는데... 그때 그 캄캄한 두려움 속에서 네 얼굴을 처음 봤어. 나를 향해 뻗어오던 네 따뜻한 손의 감촉도 생생하게 기억나... 그때 결심했지. 꼭 너에게 말을 걸겠다고. 너와 친구가 되겠다고 말이야. 그것뿐이었어. 정말로.'

  "네가 말했잖아. 꽃이 질 때는 이별이라고 말하지 않는 거라고. 봄이 오면 꽃은 또 피는 거니깐. 수백 번이고 다시 필 꽃들을 이미 제 안고 다 갖고 있는 거라고 했잖아. 우리도 그런거라고... 네가 그랬잖아. 그러니깐 너도 봄이 오면 다시 돌아오는 거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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