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oha Oct 27. 2022

5월의 카네이션, 시어머니를 위한 왕관

[소설] 나비가 손님인 꽃집 10


  긴 세월 동안 어디서 향기를 잃어버렸는지, 카네이션은 더 이상 흔적을 남기지 않는 꽃이 되었다. 마치 톱날처럼 뾰족뾰족하던 꽃잎도 부드럽게 둥그러졌다. 트리 앤 바이올렛 안에는 갖가지 색의 카네이션들이 양동이마다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해례는 폐 안을 가득 부풀렸던 숨을 크게 한 번 내뱉었다. 꽃집은 손님이 없어도 언제나 분주한 곳이다. 농장에서 잘린 후로는 물 한 방울 먹지 못하고 먼 길을 왔을 연약한 생명. 해례는 막 들어온 꽃을 보면 언제나 제 스스가 더 목이 탔다. 불필요한 이파리를 떼어내고 줄기 끝을 잘라 깨끗한 물에 풍덩 넣어 주면 그제야 한 숨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꽃 양이 많기라도 하는 날이면 마음은 바쁜데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서 더 애가 달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꽃잎을 떼어낸 적도 있었다. 어떡해서든 움직임의 속도를 올리고 싶은 것이다. 대부분의 꽃은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다. 해례는 그것이 마치 자신을 보고 있는 얼굴처럼 느껴져서 파리한 몇 백개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만 얼굴이 붉어졌다. 빨리 물을 달라고 재촉하는 얼굴들, 그렇지 않으면 곧 시들어 버릴 것 같은 그 얼굴들이 말이다.

  줄기 끝은 꼭 사선으로 잘라야 한다. 줄기를 지나는 물관의 너비를 최대한 늘리기 위해서였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담긴 녹색의 가느다란 줄기로 물이 쭉쭉 올라가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특히 물을 잘 먹은 카네이션을 가위로 자르면 흠뻑 머금은 수분이 잘린 줄기 끝에서 냉큼 멀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설사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물을 끓어당겨 생명을 연장하는 소리. 연약하지만 강렬한, 살아 있는 것의 소리였다. 물을 품어 여러 겹 겹쳐 입은 치맛자락 같은 꽃잎이 팽팽하게 살아나면 카네이션은 무척 아름다웠다. 꽃잎 하나하나마저 섬세하게 빛났다. 그 많은 꽃들이 어버이날 아침, 꽃집 문을 열기 전에 모두 꽃바구니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해례는 또 마음이 바빠져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그란 꽃이야. 카네이션은 화환 혹은 왕관을 뜻하는 ‘코로나’라는 말에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고 했어. 왕이 되면 머리 위에 화려한 모자를 쓰는 거야. 처음 그 모자를 쓰는 것을 ‘대관식’이라고 하지. 먼 나라에서는 그걸 코로네이션이라고 불렀데. 어때, 카네이션이랑 비슷하지?

우리 엄마는 정말 모르는 게 없어. 아치 이모는 엄마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맨날 화를 내지만 말이야...

그게 아니라... 우리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아치는 좋은 친구란다. 꽃에는 관심이 없지만... 생선을 더 좋아해야 하니까. 

생선가게 고양이라서? 우리들은 꽃집 고양이고?

아기 고양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는 꽃집 고양이야. 그래서 모든 꽃을 사랑하지. 얘들아, 이건 비밀인데... 엄마는 모든 꽃을 다 좋아하지만 카네이션은 싫어. 카네이션은 해례를 가장 많이 울린 꽃이거든. 오늘은 카네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게. 엄마의 엄마 또 그 엄마 때 일이란다...



 

  “그러니까 그 아줌마가 지금 차 안을 온동 헤집고 있다고요...”

  전화기 너머로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다급하게 이어지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어버이 날을 맞아 작은 꽃집은 오랜만에 드나드는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기사님, 도대체 무슨 일인지 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지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이른 아침, 주문받은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차 한가득 싣고 나간 배달 기사가 해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배달을 나간 지 1시간이나 지난 시간인데 아직 첫 번째 집이라고 했다.

  “오전 중에 다 돌아야 하는 데 아직 상일동 첫 번째 집이란 말씀이세요?”

  그 말과 동시에 고개를 들자 여자 손님 하나가 해례를 쏘아보고 있었다. 물어볼 것이 많은데 여태 전화기를 붙들고 있냐는 표정이었다.

  “영은아, 여기 손님 좀...”

  해례는 눈짓으로 은영을 부르고는 낮게 속삭였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꽃바구니를 갖다 드렸는데... 마음에 안 든다고 주차장까지 내려오셨더라고요. 그리고는 다짜고짜 차 문을 열고 마음에 드는 걸로 바꿔가시겠다고 지금 차 안을 다 헤집어 놓고 있어요. 어떻게 말릴 수도 없는 분이시네요.”

  상황을 이해한 해례는 점점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오늘 같은 날은 꽃배달이 밀려서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차에 실려 있는 건 주문한 손님들의 요청에 따라 금액과 꽃 색깔, 꽃 종류까지 다 다르게 준비되어 있는 것이었다. 자식들이 보내는 편지나 메시지를 적은 카드까지 다 꽂혀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꾀나 애를 먹어야 했다. 많은 꽃들이 상하지 않게 차에 싣는데만 해도 한 시간은 족히 걸렸는데... 그걸 다 헤집어 놓고 있다니. 꽃이라도 상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해례의 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단... 최대한 좀 말려 보세요. 금방 다시 전화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해례는 다급한 손길로 주문서를 뒤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카네이션 꽃바구니 주문한 꽃집입니다. 저 어머니께 꽃바구니를 전해드리기는 했는데요...”

  이러저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딸이라면 엄마를 진정시킬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 주문한 사람의 요청에 의해 만든 꽃바구니라 주문자는 벌써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까지 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머, 죄송해요. 그런데 저희 예비 시어머니 시라... 저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데... 잠시만요. 오빠한테 한 번 얘기해 볼게요.”

  오빠는 손님의 남자 친구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꽃바구니를 주문한 손님은 딸이 아니라 예비 며느리인 것 같았다. 해례는 뭔가 잘 못되어가고 있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바빠 죽겠는데 너 뭐 하는 거야? 전화통을 왜 그렇게 붙들고 있어? 주문 전화도 아닌 것 같은데...”

  “영은아, 아무래도 이건 코드레드야.”

  메시지 알림 소리에 눈길은 빠르게 핸드폰 화면으로 향했다. ‘지금 출발합니다’라는 배달 기사의 메시지였다. 미간에 잡힌 주름은 채 펴지지 않았지만 해례의 입에서 숨이 토해져 나왔다. 잘 해결된 건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한 찰나,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귀청을 찢는 고함소리에 몇 발짝 떨어져 있던 영은 마저 어깨를 움츠렸다.

  “야, 너! 우리 아들한테 전화를 했어? 감히 네가 뭐라고 바쁜 우리 아들한테 전화를 한 거야. 어디서 거지 같은 꽃바구니 하나 보내 놓고... 돈은 돈대로 받아 처먹을 거 아니야!

   허여 멀 건하니 어디 초상집에라도 보내는 건 줄 알았네. 다른 집에 가는 건 잘도 만들어 놓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바꿔 줘야 할거 아니야? 어디! 이 따위 꽃 도로 가져가. 당장 가져가란 말이야!”

   “꽃이 시든 게 아니라면 꽃을 받으신 분의 요청으로는 교환이나 환불은 불가합니다. 저희는 주문하신 분과...”

  전화는 갑자기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해례가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벨은 다시 울렸다.

   “니들 오늘 어버이날이라고 돈 좀 벌어 볼 생각하고 있지? 웃기지 마.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전화해서 주문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받게 할 테니까 두고 보라고!”

  그리고 또 전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또다시 벨소리. 해례를 보고 있던 영은의 눈이 점점 커졌다. 해례는 갑자기 손이 떨려서 수화기를 쥘 수 없었다. 전화벨은 끈질기게 울리더니 다시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해례야, 전화 좀 받아봐.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라고.”

  “으, 응...”

  전화벨 소리가 꽃집 안을 온통 채워 나가고 있었다. 해례의 머릿속도 온통 다급한 전화벨 소리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손은 수화기에서 자꾸 미끄러져 버리고 말았다. 겨우 집어 든 전화기에서는 또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너! 우리 아들이 서울에서 어디 다니는 줄 알아? 걔가 얼마나 바쁜 앤 데, 아침부터 네가 뭔데 전화를 걸어, 응? 건방지게. ”

  “저, 그게 아니라... 손님, 진정 좀 하세요. 제가 아드님께 전화를 한 게 아니고요. 꽃바구니에 카드도 꽂혀 있지만, 며느리 되실 분이 주문을 하셔서, 파스텔톤으로 은은하게 만들어 달라고... 신경 많이 쓴 건데...”

  해례는 자신의 입술이 제멋대로 떨리고 있다는 걸 느끼자 윗니로 아랫입술을 꽉 눌렀다. 하지만 목소리까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대방의 고함 소리가 좀처럼 잦아들지 않자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벌떡거렸다. 그랬다. 해례는 너무 무서웠다. 상대방의 분노가 너무나 두려웠던 것이다. 

  허여멀건 하다는 그 색깔이 주문한 사람의 요청사항이라고 하면 좀 수긍할 것 같아서 꺼낸 말이 도리어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버린 걸 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카드고 나발이고 뽑아 버려서 모르겠고, 며느리는 누가 며느리야. 어쨌든 내가 너 가만히 안 둬. 당장 와서 사과하고 이 빌어먹을 꽃바구니 도로 안 가져가면 인터넷이고 어디고 다 올려 버릴 거야. 오늘만 장사 못하게 할 줄 알아? 아예 영영 문 닫게 만들어버릴 거야! 당장 이 꽃바구니 내 눈앞에서 치우란 말이야.”

  그제야 해례는 그 이유도 없고 대상도 없는 분노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손님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꽃집이 영영 문을 닫거나 더 이상 주문을 받지 못하게 돼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미 꽃을 주문한 손님들이 확인 전화를 걸어 올 수도 있었다. 배달이 잘 되었는지, 픽업해 갈 꽃이 마무리되었는지도 궁금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있었다. 마침 꽃집으로 들어오던 손님마저 계속 이어지는 벨소리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입구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해례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제발 마음 푸시고 제 얘기도 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전화는 다시 끊어졌다.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놓자 다시 벨소리. 해례는 이제 거의 울고 있었다. 하지만 영은만 꽃집에 남겨두고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다른 손님들까지 분노하게 만든다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테니까.

  “어머니, 어머니! 제발 제 얘기 좀... 많이 속상하신 거 알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멀리서 고생하시는 아드님이 보내 주신 꽃인데... 마음에 안 드셔서 어떡해요.”

  숨도 쉬지 않고 거기까지 말하는 동안 전화기 너머에서 더 이상 고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해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드님께서 세련되셔서 너무 화려하기만 한 꽃은 싫다고 하시더라고요. 고상하고 우아하게 만들어 달라고... 어머님께서 평소에도 그런 걸 좋아하신다고 하셨나 봐요. 그래서 며느리 되실 분이 은은한 색감의 꽃으로만 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신경을 엄청 써서 흔한 꽃은 다 빼고 고급스러운 꽃으로만...”

  해례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야 된다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손님이라는 호칭도 어머님이라고 바꾸고 손바닥을 마주하고 싹싹 빌기라도 하는 것처럼 애절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중간중간에 죄송하다는 말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해례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울먹임이 섞여들자 간절한 호소는 점점 웅얼거림으로 바뀌고 있었다. 입구를 서성이던 손님이 결국 나가버리자 은영이 조용히 가게 문을 잠갔다. 

  “우리 아들 봐서 내가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는 거야. 너 똑바로 해. 알았어!”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꽃집을 울리던 전화벨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해례는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진짜 극한 직업이네. 도대체 뭐 때문에 그 난리를 친 거야?”

  “나도 모르지.”

  모르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여자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아들이 엄마에게 전화해서 뭐라고 했을지... 그리고 아들의 전화를 받고 엄마가 얼마나 분노했을지 해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해례가 꽃집을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많은 사실들 중에 하나였다. 잘난 아들을 둔 엄마는 아들이 장가를 가면 갑자기 왕관이라도 쓴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 권력의 끝에는 무엇하나 탐탁치 않은 며느리가 있었다. 행여나 아들이 여자 친구나 부인 편을 들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이다.

  꽃 배달을 가려는 데 집에 사람이 있냐는 확인 전화에 누가 보냈거냐고 물으면 해례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며느리’라고 말하는 순간 그딴 거 받으려고 기다릴 수 없으니 지금 나간다는 말이 돌아온 적도 있었다. 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은 예사로 했고, 다른 곳으로 갖다 달라는 말에 주소를 문자로 보내달라고 했더니 아무렇지 않게 욕부터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해례를 마치 며느리처럼 대하거나,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끼어 난감한 상황도 많았다. 혹시나 자신의 실수로 흠이 잡히거나, 좋지 않은 소리라도 들을까 봐 시어머니께 보내는 꽃이라면 해례는 몇 배 더 신경을 썼다. 

  “그래서 어버이날은 너무 긴장돼. 부모님께 감사를 전하는 따뜻한 날인데, 이건 뭐 살얼음 판이 따로 없어.”

  “아직 시집도 안 간 네가 벌써 시어머니한테 쫄아 있는 거야? 그것도 남의 시어머니들한테?”

  “딸이나 아들이 보낸 꽃이라고 하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기시는데... 눈물을 글썽이는 분도 있다니깐. 그런데 며느리가 보낸 꽃이라고 하면 다들 도끼눈이 되는 거야. 근데 웃기는 건 또 결혼하면 전부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들이 꽃을 보내. 그냥 아들이 보내면 더 좋아하실 텐데...”

  “시집간 딸들은 어떠냐?”

  “다 사위가 보내지. 딸들이 주문해도 카드에는 사위라고 써. 근데 사위가 보낸 거라고 하면 더 좋아하셔. 이상하지?”

  “오늘 그냥 대충하고 집에 가자. 돈도 좋지만 남의 집 싸움에 껴서 이게 뭐냐? 아무래도 그 아줌마 지금 아들 결혼 반대하는 거 같은데... 아들이 전화해서 엄마한테 엄청 화냈나 보네. 그렇지? 착한 우리 아들이 나한테 대드는 건 못된 며느리 때문일 거야... 그러면서 부들부들 떨다가 화풀이는 너한테 다 해버린 거잖아. 왜 듣고만 있었어? 사과할게 뭐 있냐, 네가?”

  “내가 화내면 주문한 손님도 난처해지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해례는 누군가 자신을 향해 화를 내는 것이 무서웠다. 그리고 그 상황이 끌고 올 지나간 시간들이 두려웠다. 누가 잘못했고, 뭐가 잘못됐는지 조차 상관없었다. 그저 빨리 그 상황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해례는 빌고 또 빌 수 있었다. 

  “나는 희한하게 꽃집을 하면서 결혼이 더 무서워졌어. 오히려 결혼에 대한 로망이 생겨야 할 텐데 말이야. 그것도 아니면 연애에 대한 로망이라도...”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놓던 영은은 해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해례는 카네이션을 볼 때마다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르는 시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어. 이제 며느리를 향해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는 위엄 넘치는 모습 말이야. 이천 년 전부터 재배 하기 시작한 카네이션은 신의 꽃이라고 불리기도 했단다. 실제로 의식에 쓰는 화관에 많이 쓰던 꽃이기도 했데. 이천 년이라니... 상상이 안 가는 시간이지? 엄청 오랜 시간이야. 우리 고양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이제는 어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을 뜻하는 꽃이 되어서 어버이날 많이 선물하지만, 해례는 오히려 그것보다 왕관이 더 어울리는 꽃이라는 생각이 든데. 시어머니의 왕관 말이야. 엄마는 해례를 주눅 들게 만드는 이 꽃이 예쁘지 않아. 게다가 수명은 또 어찌나 긴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은 그 기세처럼 말이야.

  하지만 해례는 이 꽃을 좋아했어. 향기도 없고, 꽃이 질 때도 꽃잎 하나 떨어지지 않고 조용히 오그라든단다. 그 모습이 까다로워 보이지 않아서 좋데. 무난하고 과묵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듬직한 기분이 들었다나. 

  이렇게 꽃은 한 가지 모습만 가지고 있지 않아. 우린 언제나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것을 좋아하게 된 그 이유 때문에 결국 미워하게 되기도 하니까. 




  “차라리 돈을 벌겠다는 목표를 가져. 돈에 대한 엄청난 욕망을 가지란 말이야. 그럼 못 참을 게 뭐가 있겠냐? 그런데 너는 손님들을 만족시키겠다, 예쁜 꽃을 보여주겠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자꾸 더 힘들어지잖아. 손님을 생각하지 마. 돈만 생각해. 돈만. 그럼 사람들한테 실망할 일도 없다고.”

  해례는 돈을 벌러 나와서 자꾸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꾸만 상처를 쌓아가는 일인데도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어버이날도 끝이 났다. 그 단 하루를 위해 해례는 한 달을 준비하지만, 카네이션을 키우는 농장이나 멀리서 카네이션을 수입해 오는 사람들에겐 일 년을 준비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날이, 주고받는 카네이션이 얼마나 가족들을 더 사랑하게 만들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는지 해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의무가 되어 마지못해 준비하는 선물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해례의 정성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해례는 영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힘들 때는 네 말을 떠올릴게. 돈을 떠올릴게.

  어차피 그저 일이고 목적은 돈일뿐이다. 신의 꽃이자 왕관과 대관식을 상징하다가 이제는 ‘어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이 된 이 꽃은 사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꽃 중에 하나가 되어 거대 산업 작물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이건 비밀인데... 꽃집을 하면서 사랑이 넘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은 더 공허해진 것 같아.”

  “미치겠네, 진짜. 무슨 헛소리야. 돈 벌러 나온 거지 무슨 사랑 타령이니, 네가. 아직 사랑도 못해봤으면서...”

  결국 사랑도 사라지고, 형식적으로 주고받는 선물 속에서 남은 건 무엇일까. 해례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알량한 돈이라도 몇 푼 남아있기를 바랐지만, 여전히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꽃을 보고 있자니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될 것 같았다. 



#시어머니 #며느리 #어버이날 #카네이션

이전 09화 첫사랑, 꽃바람이 불고 꽃비가 내리는 4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