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시 잊고 있던 나의 꿈을 찾다.
나는 9번 임용을 본 임용 초 장수생이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지 몰랐는데~
오랜 시간 공부하였지만, 합격으로 끝나는 다이내믹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았다.
내가 고3이었던 시절 우리 집은 정말 어려웠다.
대학 등록금이 없어서 입학 몇 시간을 앞두고 아빠가 겨우 구해오셨다.
그렇게 나는 정말 힘겹게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생의 낭만도 잠시,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학원과 과외 아르바이트로 24시간이 부족했다.
방학에는 낮시간에도 과외를 할 수 있으니 아침부터 밤까지 과외가 계속되었다.
오죽하면 학기 중이 나에게 숨 쉴 수 있는 시간이 있구나 싶었다.
전공으로 만난 수학은 참으로 어려웠다.
내가 알던 수학이 아니었다.
수학적 직관이 부족한 내가 직관이 번뜩이는 친구들을 따라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
전액 장학금을 받는 일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학원일을 더 많이 했다.
그때 학원일을 조금 줄이고 반액 장학금이라도 받겠다는 생각으로 전공공부를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
하지만 20살, 어느 누구 하나 나에게 방법을 알려주는 이 없었고,
누구 하나 나의 어려운 대학생활에 관심이 없던 시절
나는 어리석은 판단을 했고, 학교 생활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아마 그때 공부의 길을 택했다면 임용에 합격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는 대학을 겨우겨우 졸업하고, 자연스럽게 입시학원에 들어갔다.
수학과를 다니는 동안 은행에 취업하고 싶었다.
그러나 학점이 좋지 못했고, 그 당시 많은 학생들이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때라 어학연수는커녕
해외여행도 못 가본 나에게는 많은 부분이 취업에 적합하지 않았다.
내가 빨리 할 수 있는 일, 가장 익숙한 일, 가장 잘하는 일, 평소에 하던 일을 그냥 하기로 했다.
내가 졸업할 때까지도 우리 집의 형편이 나아지는 다이내믹한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나는 목동의 유명한 특목학원에 취업했다.
나는 이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내가 과외를 했을 때, 학교 다니면서 학원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와는 또 상황이 달랐다.
우리 학원에 들어오기 위해서 아이들이 개인 과외를 해서 진도를 맞춰 들어온다.
초등학교 5, 6학년의 아이들이 고1 내용을 배운다.
똘똘한 아이들이 기하 문제를 아주 기가 막히게 풀었다.
나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나도 학원을 안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학군지의 아이들이 이 정도라니~
정말 많이 놀랐다.
방학 때면 그 어린아이들이 하루 종일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다.
점심도 학원에서 먹으면서 하루 종일 영어와 수학 수업을 듣는다.
난 그때 생각했다.
내가 아이를 낳으면 우리 아이는 절대~ 학원에 보내지 않겠다고 말이다.
26살의 젊은 선생님은 나이가 깡패라고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선배선생님들의 도움으로 학원에 잘 적응한다.
물론 나에게는 우리 집안의 생계가 달린 절실한 곳이었다.
피할 수 없기에 즐기면서 정말 뼈를 갈아 넣으며 일했던 곳이다.
더욱이 이때 내가 받은 급여가 지금 받는 급여보다 훨씬 많으니 내가 반드시 버텨야 하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너무 좋았지만 360여 일 중 330일 이상을 일해야 하는 곳,
누가 나오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험 기간에는 일요일도 출근해야 하는 곳,
15년 전의 학원의 복지는 내가 있었던 곳이 좋은 편에 속했지만 그 정도였다.
요즘은 젊은 원장님도 많아졌고, 좋아진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학원 선생님에 대한 복지가 많이 좋아졌지만,
그때는 그랬다.
너무 힘들어서 우는 날도 많았지만, 나의 기억에는 친절했던 선배 선생님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참으로 좋았다.
아이들이 참으로 예뻤다.
그러나 2년쯤 지나니 몸이 많이 힘들었다.
아프기도 많이 아프고,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두겠다고 살포시 말씀드렸다.
그때 원장님께서
"선생님은 학교로 가세요. 파트로 돌려드릴 테니 교육대학원에 한 번 지원해 보세요."라고 말씀하신다.
나에게 많은 멘토가 되어 주셨던 원장님이다.
어린 선생님이 어떻게 학원에 적응해야 하는지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원장님께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왜 그러셨냐고 따져 물어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그 원장님의 한마디에 나의 모든 세포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교사라는 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재밌고, 신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대학 때도 하지 않았던 전공공부를 끄적끄적했고,
다행히 그 해 교육대학원에 합격했다.
교육대학원 생활은 너무 행복했다.
낮에는 교수님께 양해를 구해 학부 전공수업을 청강했다.
20대의 푸릇푸릇한 대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니, 내가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았다.
대학의 살아 숨 쉬는 공기가 너무 좋았다.
저녁 대학원 수업에서는 교육학 내용을 배우는데, 교육학이 또 진짜 재밌었다. 얼마나 재밌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업을 들었다.
대학 때도 거의 먹어보지 못한 학식을 여유 있게 먹고,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면서 한 껏 여유를 부려 본 시간이었다.
더욱이 이때 남편을 만나고 있던 중이라,
학교 수업이 끝날 즈음, 남편이 학교로 데리러 왔다.
나는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오늘 배운 내용들을 괜스레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신나게 설명한다.
그러면 남편은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내가 배운 내용들을 쉽게 설명해 준다.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교육학을 배운 적도 없는 이 사람이 이렇게 잘 알다니 ~
속으로 많이 놀랐고, 남편에 대한 확신이 더욱 커져갔던 때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말한다.
"그런데, 교육대학원에 갔으면 학교 선생님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말한다.
"아니요. 학교 선생님은 그냥 되나요. 요즘 시험이 엄청 어려워요.
그리고 전 대학 때 일하면서 공부하는 거 정말 정말 질린 사람이에요.
일하면서 공부하는 거 이제 진짜 다시는 안 해요."
남편이 말한다.
"그럼, 내가 공부만 할 수 있게 해 주면 되는 거예요?"
아.............
정말 멋진 남편이다.
남편은 공부만 열심히 해서 합격하라는 뜻이었겠지만,
나는 합격은 이루지 못한 채 정말 원 없이 공부만 했다.
그렇게 나는 남편과 결혼을 하고, 임용시험이 어려운 것임을 알기에 아이를 낳고 공부하기로 결정을 했다.
다행히 우리의 마음이 통했는지 예쁜 딸을 낳고, 바로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나의 임고인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