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기억

어떤 느낌인가요

by 배유정

가장 오래된 기억, 그러니까 어린 시절 첫 번째 기억이 특이하게도 꿈에 대한 기억입니다. 어릴 때 살던 집 담장 너머로 웬 도자기 같이 생긴 물건이 튀어 올라왔는데, 거기에 얼굴이 있었습니다. 마치 이말년 작가님 그림체로 대충 그린 것 같은 얼굴인데, 그게 어찌나 생생하던지. 나름 악몽이라 엄청 놀랐었는데, 신기하게도 깨어날 때의 기억은 없고 꿈의 장면과 놀라서 두근두근했던 느낌만 기억납니다.


첫 번째 기억이(정말 첫 번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저토록 명확한데, 이상하게도 두 번째로 오래된 기억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사실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자세히 따져보면 아, 이게 언제쯤이겠구나, 하며 순서를 정할 수 있겠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뒤섞인 기억들이 잡지 광고처럼 막 흘러가게 내버려 둡니다. 영화 보듯이 관찰합니다. 남쪽에선 보기 힘든 눈이 내린 어느 날, 장미나무 가시에 침을 묻혀 코에 붙이고 코뿔소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눈 오던 날과 코뿔소 놀이를 한 날이 정말 같은 날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생각보다 잘 안 붙어서 아쉬웠던 그 기분만은 정확히 기억납니다. 가족들과 낚시 갔다 오는 길에 차 안에서 장구애비가 탈출해서 기겁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비 오는 날 골목길에서 거대한 지렁이를 보고 세상에 지렁이가 저렇게 클 수도 있구나, 하고 신기해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잘 떠오르지도 않는 수십 년 전 기억들을 돌아보다 보니, 대부분 시각이나 촉각보다 감정이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란 후에도 항상, 어떤 기억을 떠올리면 감정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업무에 관한 기억들도 비슷합니다. '그때 누가 이걸 했었지'가 아니라 '그때 누가 이걸 해서 잘했다고 생각하고 안심했었지' 하는 식입니다. 기억이 저장되는 방식인지 기억을 읽어오는 방식인지는 몰라도 스스로에 대한 발견이 새삼 재미있습니다.


가족들을 떠올려 봅니다. 역시 언제가 가장 오래된 기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많이 흘러갑니다. 어릴 때는 가까웠던 아버지 생각도 많이 납니다. 낙엽이 수북한 어딘가에서 바위 위에 엎드려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때 내가 아버지 팔을 깨물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기억 역시 '살살 물었어야 하는데' 하고 미안했던 기분이 묻어 있습니다. 깨문 자리를 살펴보는 사진이 증거자료처럼 남아 있습니다.


어릴 때라도 좋은 기억들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머리 좀 크고 나서는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예전에는 떠올릴수록 원망이 커졌는데, 어느샌가부터는 원망보다 죄의식이 훨씬 커졌습니다. 내가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라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자만심 때문입니다. 물론, 그때의 나는 지금과 달랐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옛 기억들은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내가 아버지였다면 나에 대한 기억은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올리는, 얼굴 모를 마음속 자식놈의 기분을 짐작해 봅니다. 이랬겠지 저랬겠지 생각은 수도 없이 하니 아주 일상이 되었지만, 태어나 자라기까지 실제로 함께 시간을 쌓아오지는 않았기에 모든 생각이 단편적이고 파편적입니다. 누적된 경험과 감정의 교류가 어떤 형태로 굳어 갔을지는 결국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아이가 아빠로서의 나를 떠올리면 어떤 기억부터 날까, 그러니까 어떤 기분으로 떠오를까를 알 수 없습니다. 좋은 아빠가 되었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은 완벽히 일방적입니다. 사춘기도 되기 전에 문 쾅 닫고 들어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괜히 우울해집니다. 있지도 않은 자식에게 나의 첫 기억이 어떨지를 걱정하는 것도 모자라, 생각과 달리 미움받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확장시키기까지 하니 내가 봐도 쫌 우습습니다.




아빠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어떠니? 내 자식에게 물어볼 일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억해 두었다가 가끔씩 주변 사람들과 그들의 아이들에게 슬쩍 물어볼까 합니다. 질문 하나로 인생의 도서관을 통째로 훑어보게 만드는 초능력을 좀 부려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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