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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정 Feb 08. 2022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입니까?

십년 쯤 전, 당시 다니던 회사로 동갑내기 A가 이직을 해 왔습니다. 같이 고생하면서 친해져서 퇴근하면 회사 욕하면서 술 먹고, 가끔 노래방에도 갔습니다. 둘 뿐이라 챙피할 게 없으니 아주 발라드의 제왕들 납셨습니다. 마지막은 항상 안 올라가는 고음 노래 도전입니다. 이러라고 만든 노래가 아닐 텐데, 임재범 형님, 박완규 형님, 김성면 형님 등 여러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점심 시간에 운동해서 인간이 되자며, 회사 앞 공원에서 농구 잠깐 했다가 둘 다 힘들어 죽을 뻔 하기도 했습니다. 저질 체력의 포화 속에 죽음의 고비를 같이 넘긴 동료입니다. 당시 겨우 삽십 대 초반의 몸으로, 십년 전만 해도 안 이랬다며 영감님 같은 한탄을 했습니다. 지금은 아마 농구하러 가는 길에 쓰러질 듯 합니다.




한 번은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A가 뜬금없이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때가 언제냐고 묻습니다. 별 생각 없이 대답하려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없음에 스스로에게 놀랍니다.


물론 크게 힘든 일 없이 평탄하게 살았던 것도 사실이고, 힘들다고 할 나이도 아니었지만, 동시에 비교적 멘탈이 강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사십여 일을 연속 출근하고 그 중 대부분을 늦게까지 야근해도 못해먹겠다는 생각 안 했고, 결혼식 전날 야근도 그러려니 했고, 이상한 보스들이 뒤통수를 쳐도 어쩔 수 없지 했습니다. 동기들이 많이 힘들어할 때, 정말로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 질문은 곧 놀라움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일 뿐 아니라 가장 좋았던 일도, 가장 슬펐던 일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이의 아픔에 공감하고, 길에서 스치는 풀잎 하나하나에 기분이 좋고, 입에 들어가는 모든 음식이 맛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최고, 최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나 봅니다. 특별히 순위를 매기지 않고 그냥 그런가보다, 했던 것 같습니다.




몇 년 후, 지금 있는 회사에서 좀 특이하게 힘든 일을 한 번 겪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너무 부당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꽤 오래 트라우마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아, 정말 힘든 일이란 이런 식이구나, 하고 서른이 훨씬 넘어 깨닫습니다. 사람마다 힘들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다르고, 나는 그저 ‘힘들어요’ 발동 스위치를 눌러 본 적이 없었을 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수 년간 아이를 갖지 못해 힘들어하면서 또 하나의 스위치를 발견합니다. 여러 감정이 닳아 없어지고, 인생이 TV처럼 팍 하고 꺼지기만을 바라는 마음 외에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던 날들. 그러다 약물의 힘으로 그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을 만큼 정신을 차렸을 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내가 ‘가장 힘든 때’를 겪었음을, 저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까지 십 년이 걸렸음을.




이제는 이마저도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진리일 수 밖에 없는 이 말이 왜 진리인지 가슴으로 깨닫습니다. 고생 끝에 낙은 없었지만 그나마 조금 더 강해져서 다행입니다. 여전히 철없는 아저씨지만 조금은 어른이 되었나 봅니다.


다만 동시에 더 약해지기도 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이 몸서리쳐지게 무서워집니다. 얻지 못한 아쉬움은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에 못 미칠 것입니다. 유정이 없는 삶은 결국 적응하게 되겠지만 아내는 자꾸자꾸 더 소중해질 것입니다. 제일 힘든 시기는 지났지만, 아내와 지내는 하루하루는 지금이 제일 좋습니다.


요즘은 주말마다 마누라 뭘 먹일까 생각부터 합니다. 같이 먹는데 나만 두꺼워지는 건, 음, 뭐 어떻게든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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