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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정 Jan 25. 2022

쓰레기 줍는 잔 다르크

아내는 환경에 관심이 많습니다. 쓰레기를 줄이려고 노력하고, 분리수거도 열심히 합니다. 중국음식이나 치킨을 포장해 올 때 '젓가락 빼 주세요~'는 필수입니다. TV 다큐에 지구 지키기에 앞장서는 아이들이 나오면 대견해합니다.




둘이 가끔 가는 조용한조용했던 해변이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도 드물고 가게도 몇 없었는데, 요즘은 휴양림도 생기고 펜션도 생기고 해서 사람이 바글바글합니다. 많은 사람이 즐기게 됐으니 좋은 일이지만 고요 속의 파도소리는 그립습니다.


캠핑하는 사람이 많으니 조개 캐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러다 멸종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들 캡니다. <동물의 숲>이라는 힐링 게임에 유독 한국 사람만 댕댕이처럼 일해서 장사하고 집 산다더니, 여기가 딱 그렇습니다. 쉬러 온 건지 남은 체력 다 태우러 온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 포크레인들 사이를 손잡고 걷다 보면 밖에 나와 있는 조개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럼 우린 조개는 캐는 게 아니라 줍는 거라며 킥킥거립니다. 조개 줍는 김에 쓰레기도 좀 주워 봅니다. 몇 발짝 걷지도 않았는데 봉지 하나가 가득 찹니다. 포크레인들이 하나씩만 주워 주면 금세 깨끗해질 것 같은데, 눈에,불을 켜고 땅만 파고 있으니 아쉽습니다.


토목공사 현장을 뒤로 하고 해변 데이트 필수 코스인 컵라면을 먹으러 갑니다. 주운 조개는 가다 보이는 귀여운 아기들한테 팝니다. 가격은 "감사합니다"한 마디와 어색한 웃음입니다. 내 새끼 있었으면 안 팔았을 텐데, 집에 갖고 와도 줄 사람 없으니 팔고 와야 합니다. 거래를 마치면 달랑달랑 쓰레기 봉지를 들고 와 분리수거를 하고 새참 타임을 갖습니다.




아내 덕분에 많이 배우고 삽니다. 쓰레기를 안 만들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이 줄였습니다. 어디에 버려야 할지 헷갈리는 쓰레기가 생기면 아내에게 쪼르르 달려갑니다. 이건 여기, 저건 저기 하고 환경부 장관님 결재를 받습니다.


장관님은 가끔 맥주캔 찌그러트리기나 비닐 쓰레기 압축 임무도 부여합니다. 깡통 비운 주범의 책임감을 손끝에 모아 열심히 구기고 누릅니다. 잘 먹고 커진 엉덩이로 깔고 앉으면 커다란 비닐 뭉치가 3분의 1로 줄어듭니다.




딸이 있었다면 한국의 그레타 툰베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돈 벌어 고오급 소고기를 암만 잘 구워도, 딸내미 환경운동 지원하는 보람 맛은 안 날 것입니다. 유정이가 엄빠와 함께 조개랑 쓰레기 줍고 커서, 덥고 더러운 시대의 잔 다르크가 되는 상상을 합니다. 당연히 아빠는 수행비서입니다. 그 핑계로 가족 여행을 다녀도 재미가 쏠쏠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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