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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올가미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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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지아 Jul 28. 2023

가깝고도 먼 친정이었다

명확했던 건 단 하나, 이혼


내 연락을 단 한 번도 안 받던 나의 친정부모는

전남편의 연락을 받고 나를 찾아 병원으로 왔다.

내가 정신이 깨자,

내 집을 정리하고 본인들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친정부모와의 삶이 시작되었다.

내 몸은 이미 망가져있었다.

5분 이상 걷지 못하는 저질 체력,

그리고 갑상선 문제가 있었다.


내 부모는, 그제야 그런 나를 안쓰러워하고 안타까워했다. 내 체력을 올리기 위해 나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나갔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나를 창피해했다.

이혼하고 친정에 내려와 있는 딸이 창피했던 엄마는 친척들에게 내가 친정에 있는걸 비밀로 하길 강요했다.

나는 명절에도 집에만 있어야 했다.

우연히 만난 친척이 내 앞에서 엄마에게 사위의 안부를 물을 때도

"사위는 일하느라 바빠서 못 왔다. 우리 딸은 잠깐 지금 여기 있는 거다. 애는 서울의 파출부 아줌마한테 맡기고 있다. 우리 사돈 알지? 부장판사 출신에 ㅇㅇ대표인 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딸인 내가 죽다 살아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내 앞에서 사돈과 사위 칭찬을 했다.


이제는, 더 이상은 그렇게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엄만 말했다.

<이혼하는 네가 날 어떻게 아니?

너는 이혼하니까 이혼녀 딸 둔 엄마인 내 맘을 모르지? 내가 너보다 훨씬 더 힘들다.

이혼녀보다 이혼녀의 엄마가 훨씬 더 힘든 거다>


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댔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나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뇌를 거치지 않고

만만한 나에게 쏟아내는 엄마의 막말은 여전했다.

내가 양육권을 욕심내지 않아서

내 아이가 저런 말들을 안 들어서 다행이었다.

저런 거친 말들은

아이가 가끔 외가댁에 놀러 올 때만 들어도 충분한 수위였다.

적어도 시모는

본인의 아들이 무서워서, 아들에게 사랑받고자

손자에게 대놓고 상처를 주진 않을 테니까.






두 달 정도 후, 약간 기운을 차렸다.

이혼변호사를 선임했다.

엄마는 두 번째 유언을 내게 말했다.

나는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엄마의 소원이니, 일단은 존중해 드리기로 했다.

엄마의 유언으로 일단 이혼진행은 미루었다.


연고도 없는 지방에서 부모와 사는 것은 힘들었다.

나는 친구하나 없었다.

엄마는 집 앞 카페도 못 가게 했다.

엄마는 내가 새로운 남자가 생길까 두려워했다.

외로운 내가 새 남자 친구라도 생겨서

전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으려 할까 봐 두려워했다.


엄마는 내가 나간 지 2시간이 넘으면 내가 있는 장소로 불시에 쳐들어왔다.

내가 장소를 말하지 않고 집을 나가면 끊임없이 전화를 했다.

내 방에서 친구와 전화를 하면 문 앞에서 내용을 다 엿듣고 있었다.

저녁에는 가족과 함께 나가는 게 아니라면 외출금지였다.

휴대폰의 비밀번호를 알아내어

종종 카톡과 문자내용을 살펴보았다.



친정엄마는

나에 대한 안쓰러움이 조금 나아질 때쯤

다시 가스라이팅을 시작하였다.


<너는 성격이 이상해서 이서방 외엔 너랑 살아줄 남자가 없을 거다>

<여기 지역에서 만나는 놈들은 다 별 볼 일 없고 우리 집 돈 노리는 놈들이니 함부로 만나지도 말아라>

<만약 이혼을 하게 된다면,

넌 평생 불행하게 살아라.

아들 놓고 자기 혼자 행복하겠다고 이혼하는 너 같은 어미는

행복할 자격이 없다>



난 행복하겠다고 이혼하려는 게 아니었다.

덜 불행하기 위해 이혼하려는 것이었다.

엄마는 끝까지 내게 죄책감이라는 카드를 사용했다.


내가 이혼을 못하도록,

내 아들을 걸고.



독립을 해야 했다.



6개월이 지났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해진 후

나는 친정에서 독립을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혼변호사를 다시 선임해 이혼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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