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올가미 22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리지아 Jul 31. 2023

그를 사랑했었다.

마무리하며


어떠한 형태였든,

내 기준에 그것은 사랑이었다.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고

노력하고 싶었던

인연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미숙했던 스무 살부터 시작된 그와의 인연은

결국 서로를 증오하고 비난하고 혐오하며 끝이 났다.

그것도 법원에서.




그와 시작할 땐,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않았다.

누가 헤어짐을 기대하고 사랑을 시작하겠는가.

그와의 결혼생활

생각보다 힘들었고, 마지막까지 고통스러웠다.

뒤돌아보며 전혀 아쉽지 않을 만큼.

이런 걸 기대했던 게 아니었는데.

이런 모습으로 그와 끝나길 원했던 건 아니었는데.


허무하고 슬펐다.




경제적인 부분이든,

성격적인 부분이든,

조부모의 문제든,

성(sex)적인 문제든,

육아관의 문제든,


단 하나라도 맞았다면 그를 버텼을 것이다.

그 상황을 버텼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우리 엄마의 딸이기 때문에

버티는 것 하나는 자신 있었다.






종종 주변에서 묻는다.

이혼사유가 무엇이냐고.


사실, 부부가 이혼하는 것이 어찌 단순히 몇 문장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심플하게 대답한다.

95프로의 이유는 시모 때문에 이혼했다고.

정답이기도 하지만 정답이 아니기도 했다.


사실 그의 성격 또한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의 강박증과 결벽증은 가히 맞출 수가 없었다.

청소를 아무리 해도 그의 기준엔 미치질 못했고, 그의 기준엔 나는 항상 더럽고 지저분한 사람이었다.

주 6일 출근에 항상 새벽퇴근으로 가족과 함께하지도 않았기에 나와 아들은 항상 우리 둘만 다녀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아빠의 빈자리를 많이 느낄 아이를 위해 내가 아빠처럼 목마를 태우고 다녔다.

외로웠다. 

그럼에도 그는 본인만 생각했다. 매일의 아침상, 하루 쉬는날은 본인의 온전한 휴식 등. 그에게 가족은 희생만 해야하는 존재였다.

성적으로도 아예 거부당했기에 여성으로서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서 나를 거부하는 건가ㅡ하며 한없이 낮아졌다.

그와 살면서 나는 자존감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사랑을 했었기에,

그 사람에 대해서는 증오와 연민의 마음이 동시에 공존한다.

그리고 그는 엄마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바보일 뿐이니까.

엄마의 혓바닥에 휘둘려 이혼 아직까지도 엄마랑 살고 있으며, 

마흔이 넘은 현재도 엄마가 해준 밥을 안 먹으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줄 알고 있는 병신이니까.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엄마가 다려준 양복을 입고, 엄마가 방청소해주며 사는 게 가장  사는 것인 줄 알고 있으니까.

본인은 재혼하면 자기 엄마가 좋아하는 여자랑 할 거라는 사람이니까.(나도 너희 엄마가 처음엔 좋아했단다.)

결혼이 아내와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본인을 위해 일방적인 희생하기만을 바라는 병신이니까.

행복이 어떤 건지도 모르는 놈이니까.



여기에 적은 얘기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와의 시간들 중,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우습지만 이 이야기들을 풀어 영화제작을 해볼까ㅡ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물론 남편과의 시간에서 종종 기쁘고 즐거울 때도 있었다.

좋은 추억도 있었다.

잠깐씩 행복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와 장난치고 즐겁게 웃을 때도 있었다.

두 사람의 성격차이로 티격태격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 전부터 이혼할 때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했고,

부부싸움의 98프로 주제였던 시모의 존재는

온전히 그와의 행복했던 시간도

항상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처음부터 항상 시모와 셋이 사는 듯했고

그것이 너무 끔찍하고 괴로웠다.


우리 부부가 행복한 것을 질투해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려고 했던 시모와 시부 때문에

언제 또 일이 터질까 항상 불안했다.

그들은 항상 모든 것이 불만이었고

항상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이간질을 해서

나와 남편이 매일 싸우게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뿌듯해하고 즐겼으니까.


그리고

전남편과의 끔찍했던 마지막 2년.

전남편은 나를 이기고 나를 바닥으로 깔아뭉개어 양육권이나 재산에 대한 욕심을 일절 못 내도록

나를 너무 비참하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적당히 힘들게 했어야 하는데, 살 수가 없게끔 밟아댔으니까.


별거를 시작하며 그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는 그렇게 적었었다.


<난 잡초 같은 여잔데,

우리 아이때문에라도 버티려고 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죽일 듯이 밟아대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네요.

당신이 이겼습니다>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한다고, 영원할 듯이 사랑을 고백하더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리는 것이 사랑인가?

영원하지 않을 것을 왜 우리는 약속하고 고백하고 믿을까. 믿고 싶어할까.


그가 어떤 사랑을 했던,

나는 사랑이었다.

그에게도 그의 부모에게도 내 모든 노력을 다 했다.

그랬기에 그에게는 어떠한 아쉬움도 없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았을 때

아쉬운 건 단 하나다. 양육권.

난 지금도, 이혼하고 조부모가 손주를 키워주는 집들을 보면 너무 부럽다.

저 부모들은 딸이 이혼하니 손주를 키워주는구나.

저렇게 딸과 손주를 지켜주는구나.

나도 그런 따뜻한 부모가 있었다면 내 아이 데리고 나왔을 텐데.

나도 그런 울타리가 있었다면,

내 아이 지켰을 텐데.

내가 남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키울 텐데.


어쩌겠는가. 내가 그런 차가운 부모를 가진 것도 어쩔 수 없는 나의 조건이겠지.

나는 내 아이에게 그런 엄마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면 돼.

내 아이가 언제든지 쉬러 올 수 있는 든든한 그늘막을 주는 엄마가 되도록 노력하자.

나는 갖지 못했지만.




이렇게

내 인생의 큰 1부가 끝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