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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담하는 쏘쏘엄마 Oct 17. 2021

아이에게서 나의 상처가 비칠 때 (+상처입은 내면아이)

상처입은 내면아이 치료



오늘 아침, 딸이 할머니와 영상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평소 딸의 성격을 아는 할머니가 물었다.


"행복아, 요즘에는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이랑 잘 놀고 있어?"


그러자 우리 딸이 아주 해맑게 대답한다.


"아니? 아직 친구들이랑 잘 못 놀아. 행복이는 그냥 많이 돌아다녀. 그런데 이제 조금은 같이 놀기도 해"


할머니는 당황했고,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과 나는 눈이 마주치자 둘 다 빵 터졌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대답에,

어찌 보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내용을 저렇게 해맑게 얘기하는 모습에,

아직도 잘 못 놀지만 그래도 이제는 조금씩 같이 놀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대견함에

웃음이 났다.


우리 딸은 12월에 태어났고, 쑥스러움이 정말 많다. 게다가 느린 기질에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인 우리 딸은 적응하는 데까지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어린이집뿐 아니라 어디서든 친구들이 와서 같이 말을 걸고 놀 때도, 우리 아이는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입을 벙긋하는 그 머뭇거림 사이에 친구는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뜨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직 서툴지만 스스로 먼저 다가가 "같이 놀래?"라고도 해보고 있으며, 친구들이 같이 놀자고 다가오면 쑥스러워하지만 이전보다는 더 큰 목소리로 "그래"라고 말하며 웃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난 우리 딸이 참 짠하고 예쁘다.  

타고난 기질을 조금씩 둥글게 깎아내며, 사회적으로 적응해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그런데 사실 이 모습이 예쁘고 대견해 보이기까지.. 나에게 시간이 좀 필요했다.


내 안의 상처입은 내면아이가 내 마음 한구석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면아이(inner child)"란 어린 시절 상처받은 아이의 모습이 성인이 되었음에도 자라지 못하고 마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나 주요한 주변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내면 아이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이며, 무의식적이고,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긍정적인 경험보다 부정적인 경험이 우세했을 때,

성장의 단계마다 충족되어야 할 욕구들이 잘 충족되지 못했을 때,

내면아이는 상처를 입은 채 자라지 못하고 마음 한 켠에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상처입은 내면아이는 어릴 때 상처받았던 그 모습대로 성인이 되어서도 되풀이된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경험했다. 성인이 된 지금은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관계에서 또 따돌림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며 다가가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사실 진심은 친해지고 싶고, 함께 하고 싶고, 관계 맺고 싶을지라도 어릴 때 상처의 기억으로 인해 또 따돌림의 아픔이 되풀이할까 두려워 방어적으로 행동한다.


상처입은 내면 아이는 내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도 계속해서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상처입은 내면아이를 굳이 꺼내서 마주하고 싶어 하진 않는다.


내면아이를 마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니까.

나의 가장 아픈 기억 속에 있는 아이니까.

보고 싶지 않고, 치워버리고 싶고, 모른체하고 살고 싶으니까 저 깊은 마음 언저리에 숨겨둔다.


하지만 숨겨둘 뿐 없어지진 않는다.

일상을 살아나가며 나도 모르게 마주하는 어떤 상황에서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온다.

그렇기에 나의 상처입은 내면아이를 어떤지 잘 들여다보고, 누구보다도 그 아이를 안아주고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 상처입은 내면아이는 오직 내 스스로만이 돌봐줄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을 때, 유독 마음이 아려오는 장면이 있을까?

그 장면 속의 어린 나는 어떤 모습일까?

화를 내고 있을까,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을까, 엉엉 울고 있을까, 무서워 벌벌 떨고 있을까..

상처 입은 내면아이의 치유는 내가 그 아이에게 다가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내 상처입은 내면아이는 "소외되었던 아이"였다. 






어린이집 하원하며 집으로 가는 길,

첫째는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엄마와 나눈다.

점심은 뭐였는지, 간식은 어떤 거였는지, 어떤 선생님이 있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즐겁다. 


그러다가 잠시 후,


"엄마 근데 나 오늘은 도히랑 소라랑 놀고 싶었는데 그냥 가만히 있었어. 도히랑 소라랑 둘이 텐트에서 놀았거든."


"행복이가 도히랑 소라랑 같이 놀고 싶었나 보다.  행복이도 같이 놀자고 해봤어?"


"아니 안했어. 나는 그냥 돌아다녔어. 책만 봤어. 같이 놀자고 하는 걸 깜빡한 거야!"


"그랬구나, 같이 놀자고 했으면 좋았을 건데. 그러면 행복이는 혼자 논거야?"


"응~ 그래도 재밌었어. 책이 재밌었거든"



방금 전까지 살랑살랑 간질거리며 행복했던 기분이 갑자기 땅으로 꺼지는 느낌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나도 모르게 상상이 된다.


좋아하는 친구 두 명이 텐트에서 놀고 있는데, 혼자 멀찍이 떨어져 그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 아이. 같이 놀자고 할 용기가 없어서 혼자서 돌아다니다가 머쓱하여 책을 보았을 아이. 시무룩한 표정.


실제로 이랬는지 아니면 다른 장면이 펼쳐졌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이미 내 마음에는 슬픔과 외로움, 소외감의 감정이 밀려 들어온다.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괜히 울적하고 마음이 아프다.


내 아이에게서 내 안의 상처입은 내면아이가 비친다.






나는 빠른 2월생으로, 내 친구들은 나보다 한 살이 많다.

느린 기질에 순하디 순했던 나는 눈치가 빠른 편도 아니었고 행동도 굼떴다.

어린 시절 나의 관계는 버거웠고, 힘들었고, 재미가 없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장면 두 개.



유치원에서 사탕을 가져오라는 친구들 말에, 엄마 아빠 잘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안방에 들어가 사탕을 챙겨서 다음날 갖다주기도 했다. 나도 친구들이랑 같이 섞여 놀고 싶은 마음에 그랬던 거 같다. 그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알리기 부끄러웠던 게 기억이 난다.


친구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데, 같이 놀자고 이야기하지 못해서 얼굴이 아플 정도로 웃으며 옆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찡그리는 순간 내가 너무 소외되버릴 것만 같아서 그랬던 거 같다.


이 장면 속에서 어린 내가 느꼈던 감정은 비참함, 소외감, 외로움, 슬픔이었다.

스스로가 바보 같았고 저렇게 말도 잘 하고 잘 뛰어노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이런 내가 초라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장면에서의 내 내면아이는 위축되었고, 소외됐으며, 눈치 보기 바빴다.



그랬던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나며 충분히 좋은 관계의 즐거움 속에서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지금 내 모습은 밝고, 되려 당당하고, 솔직하며, 거침이 없다. 여전히 배려가 많고 친절하지만, 쉽게 주눅 들지 않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


하지만 어딘가 낯설고 소외되는 상황, 그룹 무리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게 되고, 자신감이 없고,  위축되고, 작아진다.







나의 상처입은 내면아이가 잘 드러나는 상황은 내 직장 학교였다.

학교 내의 단 한 명의 전문상담교사와 별실. 소외감을 느끼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친한 선생님들이 생기더라도,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 난 계속 소외됐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이상하게 학교만 가면 위축되고, 어려웠고, 불편했었던걸 보니.  


내 안의 상처입은 내면아이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내가 가진 능력과 사회성으로 극복하려고 애썼고, 대체로 잘 어울리고 잘 지냈다.

그래도.. 뭔가 불편하고 어딘가 작아지는 느낌이 싫었다.




무시했다.

내 안의 상처입은 내면아이가 있음을 어렴풋하게 알고 느꼈지만, 마주하고 위로해 주기보다는 그냥 아주 오래전 이야기라고 꺼내놓지 않고 묻어두었다.




그래도 나름 괜찮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이렇게 아이를 키우며 드러난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는 것이.


괜찮을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말을 하지도 못해 위로받을 기회조차 없었고, 나 역시도 한 번도 그 아이를 위로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자꾸 내 상처가 아이에게서 비친다.

잠깐 감정이 지나가는 대로 놔두고, 비치는 내 마음을 잠잠히 들여다보았다.



조급해져 "먼저 가서 말 좀 걸어봐!" 하고 다그치고 싶다.

답답해서 "생각하지 마. 그냥 가서 말해. 말하면 되잖아. 놀자고. 자신감 있게!" 훈계하고 싶다.

속상해서 "다른 애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되는데, 나 닮아서 이래? 왜 이렇게 혼자 꿍해있어" 하고 비교도 하고 싶다.


그 마음들을 타고 들어가 보니, 마음 아주 깊은 곳에 상처입은 내 내면아이가 있었다.



어른이 된 나는 이 아이에게 어떻게 해주고 싶은 걸까.


사실은 다그치고 싶지 않다. 훈계하고 싶지도 않다. 비교는 더더욱 하기 싫다.

그냥.. 괜찮다고 해주고 싶다.


좀 소외감을 느끼더라도 괜찮고, 좀 빨리 말을 못 해도 괜찮고, 같이 놀자고 용기 있게 말을 못 해도 괜찮고, 다 괜찮다고. 그런 거 하나 못해도 보라고 이렇게 잘 자랐다고.


무리에 잘 섞여 놀지 못했더라도 그게 네가 한심한 아이였던 것이 아니라고, 멍청이 같지 않다고, 그냥 너는 너 자체로 소중하다고. 어른이 된 나는 이걸 안다고 이야기하며 그렇게 안아주고 싶다.


지금 내가 내 딸에게 해주고 싶고, 또 해주고 있는 것처럼.


내 안의 상처입은 내면아이에게 미안하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내 내면아이는 외면했다.

나는 공감적인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내 내면아이는 공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그 긴긴 세월을 회복되지 못하고 크지 못하고 안에서 불러줄 때까지 웅크려있었나 보다.

계속 비참했던 채로, 소외되고 초라했던 채로, 울고 싶은 채로.



그날부터 매일 밤 내 안의 내면 아이에게 다가간다는 상상을 하며, 내 아이를 더 꼭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내 내면 아이도 꼭 껴안아줘 본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행복아, 너는 너 존재 자체로 너무 소중한 아이야. 엄마가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네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힘들 때나, 그 어떤 때라도 너를 사랑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너는 소중한 아이라는 걸 꼭 기억해야 해"



내 내면아이에게도 이야기한다.


"너도 너 존재 자체로 너무 소중한 아이야. 어른이 된 내가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어떤 상황에서도 설사 네가 소외되고 비참함을 느꼈을 그 순간에도, 너는 존재 자체로 괜찮았고 소중한 아이였어. 너는 친구를 배려했고, 마음이 따뜻한 아이였어. 그 어릴 때, 너의 진가를 알아준 친구가 없어 많이 속상하고 외로웠지? 부끄러워서 꼭꼭 숨겼지만 사실은 많이 위로받고 싶었지? 이제야 알아줘서, 위로해 줘서 미안해."



딸에게 비치는 나의 모습, 그리고 그것이 때로는 내게 상처일지라도

내가 힘껏 안아주고, 마음을 알아주고, 또 위로도 해주면서

딸뿐 아니라 내 내면아이에게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준다.



그렇게 매일 밤,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으며 너에겐 사랑과 격려를 나에겐 공감과 위로를 건네 주었다.






그렇게 1년도 더 지난 오늘,  


이제는 딸의 아직 잘 못 논다는 이야기가 퍽 귀엽게 느껴지고 웃음이 날 정도로 내 마음도 회복되었다.

학교에서 좀 소외되는 느낌이 들어도 그렇다고 내가 막 비참해 보이거나 작아 보이지 않는다.


아이와 함께 성장해나가며 나도 모르게 묻어두고 있었던 어딘가에서 내 상처입은 내면아이가 또다시 드러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누군가는 학교에서 친구들로, 선생님들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또 누군가는 성취에 대한 압력으로 인해 힘들었던 상처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상처입은 내면아이를 안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  


나도 그랬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좀 드러나도 괜찮을 거 같다.


내가 우리 아이의 어떤 모습도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변함없이 매일 밤 꼭 껴안아주었던 것처럼,

내 안의 상처입은 내면아이도 그렇게 따뜻하게 마주하고, 토닥여주고, 껴안아주고 싶으니까.


여기서부터 회복과 치유는 시작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괜찮다.


지금은 또 고맙다.

그때 상처받은 경험 덕에 주변을 더 돌아볼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있어서.



육아.. 진짜 너무너무 어렵다.

몸만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은 더 피곤하고 지친다.

세상에, 애를 보는데 내 상처입은 내면아이가 툭 튀어나올 게 뭐람.

그래도 나는 엄마다.

엄청나게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아이를 끝까지 사랑으로 돌보는 엄마가 나라는 게 참 멋지다.



자부심을 갖고 오늘 육아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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