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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담하는 쏘쏘엄마 Dec 19. 2021

종이봉지 공주 (내가 너무 못생긴 날, 꺼내든 그림책)


아이들을 재우고 처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여유롭게 거울을 봤다.


세수도 못한 오늘 하루

거울 속에 이 낯선 여인은 누군가...  

못생기고 예쁘고를 떠나서.. 더러워 보이기도 하고, 푸석하고, 생기 없고, 심지어 아파 보이는 어떤 퀭한 아줌마가 서 있다.

옷 여기저기에는 오늘 하루 애들과 먹었던 음식이 붙어있다.  

게다가.. 행복이가 엄마 옷이 빵꾸났다고 했는데.. 이제 보니 복댕이가 하도 잡아 댕겨서 가슴 부분에 작은 구멍까지 나있다. 하하


애써 외모는 중요하지 않아! 난 아름다워! 이너뷰티 이너 피스를 외쳐대도..

어쩔 수 없다. 짜증이 치밀고 자존감이 땅에 꼬꾸라진다.

거울을 보며 이곳저곳 가혹한 평가가 시작된다. 아 못생겼다.


이젠 거울이 보기 싫다.

빨리 샤워만 후다닥 하고 구멍 난 내 마음과 함께 책방으로 들어갔다.

누가 날 위로해 줄래 하며 둘러보던 중

갑자기 내 눈에 확 들어온 그림책 하나.


"종이 봉지 공주"


종이봉지 공주 그림책은 개인적으로 그 책이 담아내는 메시지가 너무 좋아서 상담에서 정말 많이 활용하는 그림책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동안과는 좀 다른 의미로 표지 그림이 내 마음을 울렸다.


꿰제제한 모습으로 종이 봉지만을 걸치고 커다란 용 앞에 서 있는 공주.  

퀭한 모습으로 구멍 난 옷을 걸치고 육아라는 거대한 용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는 거 같았다.






종이봉지 공주 이름은 엘리자베스이다.

이름 한번 참 예쁘고 공주 같다.

이 공주는 로널드라는 정인이 있었다.

(표정만 봐도... 재수탱..  딸아 저런 남자는 안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용이 성을 불태우고 로널드 왕자를 잡아간다.

공주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사랑하는 왕자를 구하러 달려간다.

하지만 입고 있던 옷까지 다 불타버렸다. 그러자 얼마나 급했던지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종이봉지를 걸치고 용을 찾아 나선다.



마침내 용의 집까지 찾은 공주.

용이 무서웠지만, 사랑하는 왕자를 위해 용기를 내 기지를 발휘한다.



지혜로운 방법으로 용을 아주 피곤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공주.


이제 사랑하는 왕자 로널드를 구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상상에 부풀었을 테다.



그런데 이놈이...  보자마자 종이봉지 공주에게 더럽단다. 진짜 공주처럼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고 한다.



나라면 엄청나게 열 받고, 실망하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종이봉지 공주는 "너는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라며 왕자를 뻥 차 버리고 자유롭게, 아니 오히려 즐거워 보이는 모습으로 자신만의 길을 떠난다.


종이 봉지만 걸쳤을 뿐인데도 이 당당함이 정말 멋있다. 아름답다.







평소 같으면 이 책을 읽으면서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인 로널드를 엄청 욕했을 텐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종이봉지 공주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꺼내 든 그림책이었지만

사실은 묘하게 오늘의 나는 로널드 왕자 같아서.....................


자신을 이토록 사랑하는 엘리자베스 공주.

종이 봉지만 걸쳐 입고서라도 목숨 걸고 달려왔던 이 모든 과정을 인정해 주고 고마워해 주는 대신, 겉모습만 보고 투덜대는 그 모습에서 방금의 내가 떠올랐다.


.. 뜨끔


사실 오늘 하루 모처럼 가족들과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집에만 있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행복이는 내일도 오늘 같으면 좋겠다고 노래 부르며 잘 정도였다.

물론 세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놀아주는 이 모든 과정이 결코 쉽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을 사랑해서 최선을 다해 오늘 하루를 보냈다.


그런 나를 인정해 주지는 못할망정 거울 앞에 서서 가혹하게 외모 평가나 하고 있다니...

뭐 외모 때문에 좀 자존감 떨어질 수 있고, 예뻐지고 싶은 건 모든 인간의 당연한 욕구이지만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뜯어보며 외모를 평가할 거 까진 없지 않은가.


나 자신에게 참 미안했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고마웠다.


비록 내 모습이 종이봉지 공주 같지만.. 우리 남편과 애들은 저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 왕자 같지 않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엄마가 제일 예쁘다고 해주고.. 심지어 우리 딸은 틈만 나면 날 향해 "오~~ 귀여운데~~?!"라고 말해준다.


사랑의 안경을 썼나 보다.

그래서 그 안경 나도 써보기로 했다.


실제로 세련되고 깔끔한 엄마가 되고 싶지만 그건 내 성격상 현실적으로 좀 불가능할 거 같기에..

그냥 오늘부터 이 안경을 끼고 내 어떤 모습도 예쁘고 귀엽게 봐주기로 했다.



그래 나

예뻐! 괜찮아! 귀여워! 부피가 좀 커지고, 늘어져도.. 이 자체로도 매력 있어!



가끔 또 까먹을 때마다 이 그림책을 다시 읽어봐야지.

뭔가 웃프지만 또 이런 유치한 말에 신기하게 위로받는 밤이다.




그리고.........

공주라면 예쁘고 샤랄라 분홍색 레이스만 생각하는 우리 딸과 함께

내일은 이렇게 지혜롭고 용기 있는 종이 봉지 공주도 있다며 함께 읽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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