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 라운드
오락실에는 기묘한 낭만이 있다. 지금도 오락실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게임장? 게임랜드? 왠지 영어로 부를 것 같다. 어렸을 때 내게 오락실은 가면 안 되는 곳 같으면서도 친구들 여럿이서 있을 땐 괜한 용기가 생겨 동전 몇 개 들고 당당하게 입성하는 곳이었다. 곳곳에 너무나 현란한 조명과 난리법석인 사운드까지, 정신을 쏙 빼놓는 그곳에는 신비로움이 있었다.
어린이가 가도 될까?라는 고민을 하는 시기엔 거의 못 갔다. 교복을 입은 후에는 공부에 방해되는 장소라서 가면 안됐고, 지금 나이에도 가도 되나 싶을 나이가 되어서야 자유가 생겨 몇 번 가보았다. 그곳은 여전히 휘황찬란했다. 여전히 펌프 위에서 뛰노는 사람들,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자동차 시동 소리, 귀여운 얼굴로 나를 기다리는 인형들이 가득 담긴 뽑기 기계까지.
하지만 어느새 기쁘고 즐거운 일에도 실리를 따지는 내가 되어, 오백 원 넣고 게임하는 것에도 과연 재밌을까를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게임들도 지금 했을 때 재밌을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오백 원을 쓰는 게 맞을지 계산기를 두드려 보는 것이다. 인형 뽑기도 마찬가지다. 밖에 나가서 사면 그 돈에 더 좋은 거 많이 살 텐데 내가 저걸 뽑으려고 돈을 이렇게 써야 한다고?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다.
이런 나도 잠깐 인형 뽑기에 홀려서 기계에 돈을 부은 적이 있다. 오 년 전쯤, 혼자 일본에 놀러 간 적이 있다. 혼자 놀다 보니 내 맘대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오락실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오락실에 들어가 봤다. 한국의 오락실과 비슷한 그곳에는 인형 뽑기 기계가 죽 늘어서 있었고, 나는 어떤 인형에 꽂혔다. 그 인형은 일본에 있을 때 TV에서 본 인형인데 말랑 말랑해서 엄청 잘 늘어나는 인형이라고 했다. 왠지 그 인형이 가지고 싶어서 뽑기 기계 앞에 장엄하게 섰다. 그렇지만 뽑기도 해본 놈이 한다고, 나는 인형 뽑기 경력이 전무했다.
백 엔, 이백엔... 생긴 건 우리나라 백 원처럼 생겨가지고 가치는 열 배 차이가 나는 그 돈들을 홀린 듯이 INSERT COIN에 쑤셔 넣었다. 인형 뽑기는 과학적으로 설계된 것이 분명하다. 뽑힐 듯 말 듯... 천 원만 더 넣으면 될 것 같게 만들어서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삼만 원쯤 썼을까, 동전이 부족했다. 근처에 동전 교환기가 있어 바꾸려고 했는데 웬 무리의 청소년들이 나의 기계를 기웃거렸다. 나는 아 지금 나 하고 있다는 식의 제스처를 보이며 동전을 서둘러 바꾸어 갔다. 다시 기계 앞에 비장하게 섰고, 여전히 귀여운 인형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젠 정말 그날 예산에서 밥 먹을 돈 밖에 남지 않았다. 완전히 포기하고 돌아서려니 아까 그 청소년들이 또 내 기계 쪽으로 왔다. 이게 뭔가 가능성이 있어 보이니까 자꾸 기웃대는 것이라는 생각에 온 주머니를 뒤져서 백 엔짜리 동전 하나를 찾았다. '아싸!' 그리고 모든 기운을 담아 동전을 넣었다.
살살 집게를 움직여보았다. 제발 그 인형을 잡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아쉽게도 또 인형을 잡지 못했고, 이전보다 세게 툭 건드린 정도였다. 그 인형을 노려보았지만, 내가 초능력자도 아니고 쳐다봐도 인형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 청소년들은 비키라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 이제 포기하자. 이렇게 투자해도 안되는 게 세상에 많잖아? 이것도 그 하나야라고 생각하며 아쉽게 기계 앞에서 엄중하게 디디고 있던 발을 뗐다.
그런데 한 발을 뗀 순간, 중력이 당긴 것처럼 인형이 툭 떨어졌다.
'어?'
인형이 내 손에 들어왔다. 갓 뽑은 인형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인형을 꼭 껴안았다. 이런 기분은 무슨 기분일까. 이 정도 성취감을 근래에 느껴본 적이 있을까 싶었다. 이래서 인형 뽑기를 하는가 보다.
비가 오던 그날 사람의 한계를 시험하는 기계 앞에서 폭풍같이 돈을 쓰고 나서 한동안은 인형 뽑기 기계도 오락실도 쳐다보지 않았다. 이젠 그날 느낀 기분을 조금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불확실성 속에서 돈은 좀 썼지만,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을 딱 포기하려고 발을 떼는 순간에 얻는 기분.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던 일도 혹시 한 발짝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지, 앞으로 꿈꾸는 일들은 포기하고 싶을 때 오히려 한 걸음을 내디뎌 보면 어떨지. 그런 규칙이 적용되지는 않았을 것 같은 인형 뽑기를 떠올리며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