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에게

내게 생긴 좋은 일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것

by 조세핀



평생을 껴안고 살아갈 추억이 있다. 지칠 때 꺼내 보고, 기억을 닦으면서 마음도 어루만져주고, '그래 나한테 이런 좋은 일도 있었지'라고 생각하면서, 다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추억 말이다. 나의 경우에는 오랫동안 좋아하던 남자를 만나러 간 기억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좋아할 때 그 정도를 좋아한 기간으로 따질 수도 있고, 그에게 쓴 돈으로 따질 수도 있고, 그의 작업물을 살펴본 시간으로 따질 수도 있겠지만 최애를 좋아하는 데 있어서 그런 것들은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렇다. 나는 어떤 남자를 좋아했다기보다 한 밴드의 베이시스트, 즉 우상(idol)을 좋아했다. 그리고 여전히 좋아한다.


이 사람이 누군지부터 설명을 하자면, 아주 예전에 했던 우리나라 예능 <청춘불패>에 주제곡으로 사용된 노래인 All About You라는 팝송을 부른 밴드 '맥플라이'의 베이시스트다. 중고등학교 때 했던 예능인데, 그때 친구들이 내게 너 무슨 가수 좋아해?라고 물어보면 항상 이런 식으로 설명해줬다. 그럼 친구들은 '어 노래 좋네' 정도로 대답해줬던 것으로 기억했다.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등 그 시대 우리나라 아이돌도 아니고 아무도 모르는 밴드를 좋아한다는 것은 참으로 외로운 일이다. 그때 다른 반에 있던 딱 한 명의 친구가 이 밴드를 알고 있었는데 (내가 알려주기 전에도) 그 친구만 붙잡고 이 밴드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나이를 먹고, 그들도 전성기를 지났다. 돈을 벌기 시작할 무렵에 그들은 거의 해체했다. 참 타이밍이라는 것이 웃긴 게 가득 좋아할 때는 겨우 덕질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식었을 때는 덕질할 거리가 없어졌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언젠가 그들의 공연을 꼭 보고 싶었지만, 언제가 마지막일지 모르는 것이 그런 그룹들의 사정이기 때문에, 그저 많이 좋아했었다는 한 때의 갸륵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패션 브랜드도 만들고 책도 쓰고 일 벌이기를 좋아하던 그 베이시스트가 드디어 새 밴드를 차렸다. 그도 원래 있던 밴드가 뭉치기를 힘들게 기다리다가 새 밴드를 차렸을까? 그 의중은 모르겠지만, 이제 기어코 나와의 타이밍이 맞았다. 퇴직금을 들고 퇴사한 '나'와 밴드를 새로 시작한 '그'의 타이밍이 말이다.


'그래 가자!'


신중한 성격이지만 이번만큼은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마음으로 공연 티켓을 예매하고, 비행기 표를 끊어버리고, 숙소도 후다닥 정해버렸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비행기를 탔다.


때는 2018년 5월, 공연을 보러 가는 나는 중고등학생 때 가졌던 그 순수한 마음에 다시 불씨를 지폈다. 18시간을 비행해 도착한 맨체스터의 바람이 그 마음에 부채질을 했다. 영국에 도착한 지 이틀 째 되던 밤, 마침내 나는 그의 공연을 보았다. 눈앞에서 그가 손가락으로 베이스 기타의 줄을 튕기는 것을, 기타 피크로 줄을 긁는 것을,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자신을 보러 온 팬들에게 웃긴 말을 던지며 공연 분위기를 만드는 것을 모두 보았다.


아직도 꽤나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우리가 나눴던 세 번의 대화다. 처음 공연장에서 만났을 때는 어색하게 건넨 인사, 주춤거리는 허그에 이어서 두 번째 공연에서 만났을 때는 '아니 얘가 또 왔네?' 싶은 듯한 반응에 그래도 조금은 더 가까워진 토닥거림, 마지막에 헤어질 땐 고맙다고 왠지 진심이 느껴지는 악수를 나누었다. 나도 참 그 당시에 세련되지 못한 사회 초년생이어서 더 편하게 말 걸어볼 걸, 영국식 농담이라도 공부해서 갈 걸 하는 아쉬움이 남긴 했다. 그래도 오히려 한 번 만나고 나니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여유로움이 생겼다.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를 해결한 듯 개운했으며, 평생 끌어안고 살 추억을 하나 챙겨서 든든해졌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알아서 열심히 살면서 좋은 음악을 들려준 그에게 감사하고, 저 멀리 한국에서 온 나를 평소의 그의 성격과 다름없는, 상상하던 모습대로 맞아주어 고맙다. 이 정도의 추억이 생겨서 나는 평생 여기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내게 생긴 좋은 일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이 순간으로 꽤나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keyword
이전 07화한 발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