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에는 친절

천천히 오세요

by 조세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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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화났던 일은 쉽게 잊는 편이다. 일이 바빠서기도 하고, 꽤나 자주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고마운 일은 아주 오래 기억한다. 자주 없는 일이기도 하고, 언젠간 갚아야할 빚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5년 정도 된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어떤 고마운 일이 있다. 한 기업의 국내 첫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게 된 적이 있었다. 큰 규모의 행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국내에서 하는 첫 번째 행사이니 준비할 것이 꽤 많았다. 행사 하루 전날에도 나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할 무렵, 일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저녁 6시가 되어 행사장에 도착한 외국인 임원이 핸드마이크가 아닌 뺨에 붙이는 헤드마이크를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부하직원인 나는 ‘어쩔 수 없어 미안하지만’ 헤드마이크를 찾아오라는 팀장의 말에 마이크를 빌렸던 업체에 급하게 요청을 했다. 과연 가능할까 싶었지만, 업체 사장님 덕분에 운 좋게도 밤 8시 전에 헤드마이크를 준비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확인했고, 생각지도 못한 부분의 문제까지 해결하고 나니 마침내 마무리가 되었다. 아니, 마무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겨우 한숨 돌리고 팀원들과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럼, 이 헤드마이크는 무엇으로 뺨에 붙이지?’


스카치테이프는 금방 떨어질 것 같았고, 그렇다고 색깔 있는 것을 붙일 수도 없었다. 그 때 딱 떠오른 것이 의료용 살색 테이프였다. 얼른 사야겠다 싶어 서둘러 다이소에도 가보고, 편의점에도 가봤지만 없었다. 시간은 이미 8시가 넘었고, ‘의료용’이니 약국엔 있을 것 같아 정신없이 근처 모든 약국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약국이 문을 닫았고, 마음이 종종거리다가 덜컥거리기 시작했다. 눈이 빠지게 지도를 살피다가 8시 반까지 영업하는 한 약국을 발견했고, 그 방향으로 뛰어가면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약사님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지금 뛰어가고 있는데 30분 조금 넘어서 도착할 수도 있다고, 살색 테이프를 사려고 하는데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는지 간절하게 물어봤다. 그리고 걱정하며 답변을 기다렸다.


“...오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뛰어오지 말고, 천천히 오세요.”


수화기 너머로 나를 안심시키려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른 아침부터 쉬지 않고 뛰어다닌 나는 그 말에 잠깐 세상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팽글팽글 돌아가던 컴퓨터가 갑작스럽게 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재부팅에 성공한 나는 머뭇거리며 감사하다고 말했고, 약사님은 다시 한 번 천천히 오라고 당부하며 전화를 끊으셨다.


그날 밤 나는 적당한 걸음걸이로 약국에 도착했고, 살색테이프를 다섯 개나 샀다. 짧은 한 문장의 친절이었지만, 그 친절의 묘한 힘 덕분에 기운을 차렸고, 하루를 따뜻한 기분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날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친절은 친절로 갚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죄송해요, 조금 늦을 것 같아요’라는 메시지를 받으면 천천히 와도 된다고 말하고, 어려운 부탁이 아니면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요즘 같이 여유 없는 삶 속에서 친절하다는 건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이고,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도 좀 친절하면 어떨까싶다. 누군가가 그 친절을 갚고, 돌고 돌아 언젠가는 찾게 될 만기 적금처럼 내게 그 친절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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