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이 제철
나는 제철음식에 꽤 집착하는 편이다. 평소엔 관심 없던 음식이 제철을 맞았다고 하면 왠지 먹고 싶고, 생각이 난다. 제철의 음식들이 맛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에 살던 동네에는 옥수수만 파는 가판대가 있었다. 사시사철 옥수수를 팔았는데 마침 내가 내리는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어서, 특히 겨울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옥수수 가판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한 봉지에 두 개 또는 세 개가 들어 있어 집에 두 봉지 정도 사가면 알아서들 반씩 쪼개서 먹는다. 원뿔 같이 생긴 윗부분 파와 원통같이 생긴 아랫부분 파가 나뉘기도 하는데, 나는 아랫부분 파였다.
사실 옥수수의 제철이라는 게 있나 싶었다. 그도 그럴게 사시사철 매일 옥수수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옥수수라는 친구에게도 제철이 있다는 건 새로운 동네로 이사 와서 새로운 옥수수 가게를 발견했을 때였다. 앞치마를 입고, 안경을 쓰신, 항상 웃는 표정의 할머니께서 하시는 그 가게는 한편엔 옥수수를 팔고, 다른 한쪽엔 강냉이, 엿, 도토리묵 같은 걸 팔았다.
어느 여름 시장을 지나다가 그 가게를 발견했다. 평소라면 겨울에나 끌렸을 옥수수지만 여름에 파는 옥수수라니? 이 뜨거운 여름에 먹는 뜨거운 옥수수는 어떨까 하는 호기심 반, 사가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걱정 반을 안고 한 봉지 사려고 다가갔다. 찜기 위에 두 개씩 짝을 지어 비닐봉지에 담겨 있는 옥수수는 많이 더운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옥수수를 소개하는 팻말에는 찰옥수수 2천 원이라고 쓰여있었고, 그 앞에 '제철'이라는 단어가 강조돼 있었다.
제철...? 옥수수는 여름이 제철이구나. 그제사 깨달은 나는 두 봉지를 샀다. 일단 사기는 했는데 뜨거운 여름, 뜨거운 옥수수와 함께 걷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장바구니에 미리 사둔 아이스크림과 옥수수가 닿지 않게 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도 기울였다.
집에 와서 봉지를 열 때도 사실 조금은 망설였다. 아무리 제철이라고는 하지만, 땀이 삐질 날 정도로 가뜩이나 더운데 이것을 먹어야 할까 싶었다. 하지만 알이 꽉 찬 옥수수는 무척이나 신선하고 탐스러워 보였고, 평소처럼 반을 갈라 밑부분을 먹기 시작했다.
와그작와그작 씹혔다. 한 알씩 입 안에서 톡톡 터졌다. 제철 옥수수는 역시 제철이라 그런지 뭐가 됐든 달랐다. 모든 계절에 먹는 옥수수는 물론 모두 맛있지만 이건 특유의 단맛과 포근함이 있었다. 껍질도 너무 질기지 않고 쪘음에도 적당히 아삭했다.
제철 옥수수의 맛을 본 나는 이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퇴근길마다 옥수수를 샀고 철이 지나 그 팻말에 '제철'이 없어질 때까지 먹었다. 놀랍게도 나처럼 찰옥수수의 맛에 반한 동네 주민이 있는지 퇴근할 때 한 봉지도 남아있지 않았던 적도 많다.
철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할머니께서는 여전히 추운 곳에서 옥수수를 팔고 계셨고, 하얀 김에 이끌려 옥수수를 또 두 봉지 샀다. (남은 거 다 주세요!) 옥수수를 받아보니 추운 계절에 딱 맞는 아주 따뜻한 온도였다. 날이 많이 추워 옥수수를 난로 삼아 걸어가는데 밤 중에 홀로 켜진 경비실이 보였다. 무슨 마음이었는지 경비실 창문을 두드렸고, 시장에서 샀다고 옥수수 한 봉지를 내밀었다. 서툴게 받으시는 경비 아저씨께도 따뜻함이 제철인 겨울에 옥수수로 그 따뜻함이 전해졌기를 바랐다.